< 여행기 1>
역시 혼자는 외로웠어. 주동하는 여행은 힘들었어.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은 핵심 두 가지이다. 지난겨울 혼자 미국 올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저희들이 나서서 나를 리더한다. 출국심사와 입국심사에 관한 거의 모든 과정들을 아이들이 도맡아서 해결한다. 따라다니는 여행의 편안함을 맛보니 장거리 여행이 두렵지가 않다.
그동안 나의 여행의 형태는 국내든 국외든 늘 대군을 몰고 다니는 여행이었다. 어쩌다보니 늘 여행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것도, 계획적인 성격도 아닌데도 그러했다. 왜 그랬나 생각해 봤더니 단지 사람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에서 나온 것 같다.
중국으로 이사를 가서 몇 개월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같이 이사 간 남편회사의 엄마들과 아이들을 대동해서 닝보에서 북경으로 여행을 갔다. 버스를 대절하고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북경 여행 가이드를 섭외하는 등 언어도 제대로 안되던 시기였었다.
한국에 있는 10명의 가족들을 초빙해 상해와 항주 일대를 관광했다. 역시 버스를 렌트하고 도시와 도시를 넘나들며 가족들에게 하나라도 더 구경시키고 싶었다.
한국에서 학원 학생들을 데리고 두어 차례 중국 자유여행을 감행했을 때도 그랬다.
거의 매년 연말이면 대가족 해맞이 여행을 기획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부모님과 삼형제 가족이 모두 모이면 적지 않은 숫자이다. 가족오락관을 방불케 하는 게임과 선물들로 웃음꽃을 피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님 살아 계신동안 가장 잘 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를 모시고 언니들과 여행을 갈 때도 언제나 모든 계획은 내 몫이었다.
남편은 결혼한 이후로 줄곧 내 편이 아니었고 회사 편이었다. 결혼 후 첫 출근부터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고 했을 때는 동료들로부터 원치 않는 결혼을 했냐는 질문공세를 받기도 했다니까 말 다한 셈이다. 그러니 대가족여행에서도 늘 그는 배제대상이었다. 매번 아이들을 혼자 데리고 다녀야 하니 여행에서는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여행은 집을 나서서 귀가하기까지 안전하기만 해도 가장 잘 한 여행이라는 말이 있듯 모두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여행은 그 나름이 주는 뿌듯함도 있지만 오롯이 여행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일행들의 안전은 기본이고 여행노선이 만족스러운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코스가 힘들지는 않는지, 모든 과정들에서 일행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이렇다 할 큰 스트레스가 되는 줄 몰랐었다.
꿈속에서 자주 여행에 관련한 꿈을 꾸면서 알게 되었다. 거칠고 가파른 산 능선을 오르는데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인 꿈. 사막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는데 도저히 헤오나오지 못하는 꿈. 그 와중에 일행들이 뿔뿔히 흩어져 버리는 꿈. 고래고래 소리쳐도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일행들에게 시달리다 깨면 피로감과 허탈감만이 남곤 했었다.
중국어를 좀 한다는 이유로 최근에도 대만을 같이 여행가고 싶다고 주위 사람들이 제안을 해왔다.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50대 이후의 여행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여행이고 싶다고 말한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이다.
거의 30년을 한 회사에 다니면서 여름 휴가한 번 제대로 챙겨본 적 없는 나의 최측근은 이번 가족방문으로 일주일 휴가를 얻었다. 그것도 동료들 눈치 봐가며, 큰맘 먹고 결정한 일인 듯하다. 가장 위험한 인물이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이라던데 혹시 그런 걸까. 긴 휴가 후 돌아오면 책상이 없어져 버릴까하는 염려 때문이라는 농도 모두 옛말이 되었다. 한국의 기업의 문화를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나마 위라벨과 같은 말이 부각되기 전의 일이라 큰 가정불화 없이 지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대신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 주게 한 점으로 그동안의 고단함을 통 크게 퉁 쳐주기로 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그의 노고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이번에도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날까지 안전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