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기 3 >
여행의 목적지는 내게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랜만의 가족여행이라는 기대와 설렘만이 가득 했다. 여행의 굵직한 일정은 남편이 짜고, 그 외 세부일정들은 아이들이 채웠다. 오롯이 여행을 즐기고 싶다던 나의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가기 전 나는 책으로 여행할 장소들을 답사한 정도였다.
베이거스에 첫 발을 내 딛는 순간 숨이 막힌다는 말을 실감했다. 섭씨 44도를 육박하는 기온은 내 생애 찜질방 한증막 외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였다. 건조한 사막기후 덕에 실내 들어가면 금방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특이했다. 건조한 기후가 가지는 장점 덕에 한국에서 느꼈던 질퍽한 습기와 잠을 방해하는 모기의 존재는 금방 잊혀졌다. 바람이 뜨거운 공기를 ‘훅’ 몰고 오면, 숨은 ‘윽’하고 반사적으로 멎다 뱉기를 반복한다. 도착한 첫날은 이 더운 곳에 관광지를 만든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둘째 날이 되자 그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다. 어디 한 곳 놀랍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번에는 지형에서 느끼는 스케일이 아니다. 건물이나 볼거리에 대한 규모에 압도당했다. 한 낮의 살인적 온도와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많은 사람들이 구릿빛 살결을 드러내고 맞서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건물 안 뿐 아니라 바깥, 건물과 건물을 넘나들며 본격적인 눈 호강에 들어갔다.
난 너무 고리타분한 걸까? 맞다. 또 촌스러운 면도 있다. 그래서일까. 화려하다는 라스베이거스에 대한 열망은 애초에 없었다. 호객행위를 하는 Girl들의 차림을 보자 한 번 더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알몸보다 더 야한차림, 트라이앵글 주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나의 시선은 갈 길을 잃었다. 관광객들의 차림 역시 파격적이고 개성 넘쳤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시선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이런 자유로움이라면 나조차도 금방 젖어들고 싶어졌다.
주요 스트릿에서는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마약이 허용되는 곳이란 걸 알고 나니 행인의 체취에서 나는 냄새가 마약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거리의 노숙자들은 더운 날씨 때문에 더욱 위험해 보였다. 노숙자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조차 불법이라는 이곳의 법의 의도는 빤해 보인다.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주머니를 열게 하기 위해서 노숙자들은 방해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천국과 지옥이 함께 공존하는 이곳, 이것이 자본주의의 민낯인가 싶을 정도로 경계가 뚜렷했다. 잠시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한다. 나는 즐겨야만 했다.
호텔들이 고유한 색깔을 갖기 위해 마련한 쇼와 각종 볼거리들은 저마다 중대한 미션을 지닌 것 같았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해야 할 것, 가장 규모가 커야 할 것, 가장 화려해야 할 것’이라는 규칙 안에 있는 듯 했다. 도시 전체가 이토록 화려하고 거대하다니 놀라고 또 놀랐다. 태양의 서커스단이 펼치는 O쇼는 무대세팅이 압도적이었다. 막이 오르고 무대 첫 장면에서 딸은 벌써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공연을 해 본 사람으로서 갖는 감격이 남다름을 알 수 있었다. 무대가 온통 물이었다. 방금 강이었다가 다시 평범한 무대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공중에서 펼치는 아찔한 곡예와 즉석에서 연주하는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환상적인 공연을 펼쳤다. O쇼를 보기 전에는 내 생애 가장 큰 스케일의 공연은 중국 항주의 송성가무쇼였다. 이날 이후 순위 변경은 당연지사, 1위 자리를 조용히 O쇼에 내주고 말았다.
계절로 보나 기온으로 보나 최고의 휴양지는 수영장이었다. 호텔 안에 딸려있는 수영장이었지만 규모면으로 보자면 수영장에 호텔이 딸린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넓었다. 하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늘만을 찾아다니는 우리와는 달랐다. 강렬한 햇빛 아래 선베드에 누워 인간 바비큐를 자청하며 태우고 있었다.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놀고, 먹고, 자고, 책을 보면서 쉬는 모습은 광란의 바깥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큰둥했던 첫째 날, 흠뻑 젖은 둘째 날에 이어 셋째 날이 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기저기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한정된 시간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베이거스의 매력을 더 느끼고 싶었다. 넷째 날 이제 완전히 그곳에 익숙해진 것 같은데 아쉽게 떠나야만 했다. 다음 코스는 그랜드 캐니언이라 그나마 위안을 얻으며 떠날 수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여 안녕.
어느 작가가 인도여행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나는 라스베이거스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두 번은 아니어도, 한 번은 꼭 가볼 만 한 곳’. 비싼 물가와 무절제한 인간의 욕망들이 난무하는 곳이기에 다시 가고 싶다는 여운은 그리 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아마도 가장 화려하고 볼거리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에 한 번은 꼭 가볼만 한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