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골프 은퇴선언
아빠는 30년 동안 은행에서 일하다 정년퇴직을 하셨다. 처음 1년은 여유로웠지만, 곧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직 졸업 후 취업하지 못한 막내의 고시공부 뒷바라지를 위해서였다. 취업한 누나 둘이 도와주면 좋겠지만, 우리도 마음이 가난했다. 실제로 넉넉한 월급도 아니었고, 나 역시 이 도시에서 아슬아슬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은퇴 후 5년이 넘는 시간동안 총 세 군데 회사를 거치셨다. 그 중 3년은 왕복 4시간 거리기에 주말부부로 지내야 했고, 마지막 2년은 다행히 집 근처에서 일하셨다. 좋은 회사를 다녔던 사람들이 은퇴 후 소위 '급'에 맞는 일을 찾지 못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아빠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엇이든 받아드리는 것의 도가 트인 사람인지, 가장의 책임감이 사람을 이렇게 강인하게 만드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35년 전, 은행에 입사하기 전에 아빠는 소를 키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흘러가진 못했고, 그 무렵 내가 태어났다. 그때 원자력발전소를 공사 현장에 일용직으로 들어가셨다. 살짝 서글펐다고 했다. 일이 고되서가 아니라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해서. 은행에 몸담고서는 매년 퇴사를 결심했다니, 그 지점에서 나와 참 비슷하고 느꼈다.
우리는 그런 아빠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자랐다. 오히려 나는 '이런 가족을 나도 꾸릴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올해는 아빠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지 않은 해'가 된 것 같다. 대신 엄마가 전업주부 생활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갔다. 아직 막내의 뒷바라지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분은 한때 함께 즐기던 골프를 줄이더니, 급기야 아빠는 골프 은퇴를 선언하셨다. 그리고 파크골프로 옮겨 가겠다고 했다. 부담없이 매일 할 수 있다며, 그 안에서 또 좋은 점을 발견하신 모양이다. 엄마는 골프 은퇴는 없다고 하셨지만, 파크골프채는 아빠보다 좋은 걸로 장만하셨다.
이번 추석에는 남편과 나, 부모님과 함께 파크골프를 즐겼다. 엄마가 내기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 돈이 걸리자 집중력이 확실히 달라졌다. 골프치라는 이야기를 귓등으로도 안들렸는데, 파크골프는 내 분수에 맞는 소비라 느껴졌다. 돌아와서 당근을 검색해보고 있다.
요즘 부모님은 출근하기 전에 파크골프장으로 향한다.
새벽 6시에 두 시간을 치고 하루를 시작한다.
부모님은 늘 상황을 탓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아셨다. 골프은퇴에도 서글퍼 보이지 않는 이유였다. '나도 언젠가 그런 가족을 꾸릴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인생의 모양이 어떻든 그때그때의 계절을 즐기며,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