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사했던 시골살이

30대 부부의 집짓기

by 김아울

나는 시간이 갈수록 내가 시골 출신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아련함 때문이겠지만 그 장소가 간다고 해서 약아빠진 내가 다시 순수하게 놀아질지도 만무하다. 나의 뇌리에 콱 박혀 있는 시골 고향에 대한 기분은 배꼽 빠지게 웃고, 뛰고, 쨍쨍한 날씨, 산과 바다로 여름이며 반드시 살갗이 타들어가게 놀았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학교 운동장에 있던 겨우 몇 안 되는 놀이기구들은 지금 생각해도 위험하고, 그네 타면 쇠독이 오를 것만 같이 손에 빨간 물이 들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운동장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놀이를 해본 것 같다.


지금은 전통놀이도 좋은 시설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매끈한 대리석 위, 실내에서 연출된다. 놀이방법까지 적혀있다. 어릴 적엔 규칙 따위는 옆 동네에만 가도 조금씩 달랐기에 항상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과 조율을 했어야 했다. 그걸 하지 않는 날에는 싸움이 한 판 벌어지는 날이다.


깍두기 제도도 잘 써먹었다. 처음에는 팀을 나누고 선택을 못 받는 애가 깍두기를 하기도 했지만, 인원이 홀수라 누군가는 해야 했기에 내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 졸였다. 깍두기를 자처하기도 했는데, 그건 놀고는 싶은데 아픈 날이거나 도중에 집에 가야 했을 때 경기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보호받았다.


나의 이런 이야기는 대학에 와서 보니 아주 나이 지긋한 부모님 벌 되는 어른들의 어릴 적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비슷하게 놀고 온 나는 어리둥절했다. 부끄러울 것 같으면 고개만 끄덕였다. 가끔 농기계가 도로에 지나다닐 때 콤바인이니 하는 이름이 자동으로 나올 때면, 그걸 알고 있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나무들의 이름을 줄줄 꿰도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촌놈들을 이런 식으로 약 올리는 건 묘하게 쾌감이 있다.


우리 집은 농사로 먹고살진 않았는데,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부모님이 하나 같이 무슨 농사짓냐고 물어보는 것도 따분했다. 아버지는 꽤 넓은 땅을 물려받았는데 농사를 잘 짓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니신 것 같다. 대농이 되었더라면 더 부자가 되었겠지만 다섯 식구가 아빠의 밥벌이에 의존해 여기까지 잘 지내는 건 미스터리다. 계산적이라면 답이 안 나온다.


이제 시골로 가는 것이 어떤 도전이 되어버렸다. 다음 집은 도시가 아닐 수 있다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중이다. 내가 꿈꿨던 시골의 모습이 아닐 텐데, 완전히 비슷하진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닮아갈 수 있을지. 20살 까지 시골에 살다와도 귀촌할 결심이 머뭇거려지는데 도시 태생인 사람들의 귀농귀촌 결정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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