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윤금이
산책을 마치고 할머니를 병실 침대에 눕힌다.
한 여자가 병실로 막 들어선다. 나의 엄마라고 찾아왔던 여자, 윤금이다.
나는 바로 굳어서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윤금이는 미소를 짓는다.
“너도 왔구나. 지금 가려고 하니?”
나는 마지못해 네, 라고 대답한다.
“할머니 만나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줘. 정원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줄래?”
나는 대답 없이 그대로 병동을 나온다.
이렇게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내 할머니를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랄까. 내 할머니를 나 말고 누가 만난다는 거야? 언제나 할머니는 온전히 내 것인데.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는다. 그냥 가버리기엔 좀 그렇다. 그냥 가버려도 그만이긴 하지만.
얼마 후, 윤금이가 다가와 내 옆에 앉는다.
“잘 지냈지?”
반갑지 않다. 질투심도 느껴져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적당한 말이 없다.
“한 가지,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야.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인생에는 어떤 일이든 생기니까……. 너 혼자서 버거운 일들도 많을 거야. 그때는 여기로 전화해. 내 전화번호야. 무엇보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서 결정하기 힘들 테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연락하고 싶을 때, 그냥 해도 돼.”
내가 건네받은 명함에는 무슨 아동전문기관의 ‘상담사’ 라고 쓰여 있고, 사무실 전화번호와 휴대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어이가 없다. 욕이 치밀어 오른다. 갓난아기인 나를 버리고 나가서, 아동상담사로 살고 있다고? 웃겨도 한참 웃긴 일이다. 역시나 윤금이는 제 정신으로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평생 이상한 머리로 살고 있나보다.
“넌 내가 너무 어이없지? 그래, 알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명함을 찢으려고 한다.
윤금이가 내 손을 잡고 말린다. 나를 다시 벤치에 앉힌다.
“이렇게 말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 얘기를 끝가지 들어줘. 할머니 권유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봉사 활동하는 거야. 너한테 못한 책임을 다른 아이들에게 하라고 하셨어. 너한테 못준 사랑을 세상 아이들에게 주라고……. 할머니는 나한테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하라고 하셨어. 여자란 주변의 생명을 보살펴야 한다고.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생명을 보살피라고. 그게 여자가 할 일이라고.”
윤금이가 무거운 숨을 크게 내쉰다.
“나는 망나니처럼 내 멋대로 살았지만, 할머니가 하라면 하는, 할머니의 딸이야.”
“할머니 딸은 나예요. 내가 할머니 딸이에요.”
내가 윤금이를 옆으로 째려보면서 소리친다.
“나야말로 할머니 딸이야.”
윤금이가 헤헤거리며 얄밉게 웃는다.
“맞아. 우리 둘 다 할머니한테서 나왔어. 그래서 나는 할머니 딸답게 살려고 노력 중이야.”
윤금이는 집을 나간 다음,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한다. 다른 남자와 결혼은 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고. 지금 남자와는 삼 년쯤 되어간다고. 남자와 동거해보기도 했는데, 답답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정말 못하겠더라. 연애만 하는 게 편해. 헤어지고 싶으면 언제든 헤어지면 되고, 좋은 사람 있으면 또 사귀면 되고. 내 인생의 유일한 결혼생활이었던 그때, 네 아빠가 너무너무 답답했어.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 내 인생을 쭉 돌이켜보면 너 키울 때가 재미있었어. 애기 키우는 재미가 있었지…….”
윤금이의 표정에 처음으로 온화한 미소가 번진다.
“지금은 마을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면서 먹고 살아. 내 삶에 만족하면서 지낸단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어린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걸 윤금이도 할머니한테서 배웠다.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윤금이의 손에서 키워지는 나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할머니 손에서 키워진 게 내 인생의 최고 행운이었다. 또다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심장 가득 차오른다. 할머니의 따뜻하고 서늘한 숨결이 느껴진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