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욕조가 있는 집

21. 욕조가 있는 집

by 파랑

- 혹시 욕조라는 책, 장 필립 뚜생의 소설책, 필요해? 나 요즘 책 정리 중. 민주 씨한테 필요할까? -

권 선배한테서 온 문자다.

이 사람 정말 신기하다. 뚜생의 『욕조』를 갖고 있다니. 나는 문자를 보낸다.

- 네, 필요해요. 저 주세요.

권 선배가 바로 전화를 걸어온다.

“언제 줄까? 오늘은 종일 책 정리를 해야 하고…….”

나는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서 약속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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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문고 앞 염상섭 벤치에 앉아 있다. 맑고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오고간다. 내 얼굴 앞으로 누가 누런 종이봉투를 불쑥 내민다. 비니를 쓰고 수염은 깎지 않아 대체로 지저분한 인상인 권 선배다. 나는 싱긋 웃으며 종이봉투를 받아들고는 열어본다. 앞표지에 알록달록한 원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그림이 있는, 얄팍한 책이다. 장 필립 뚜생의 『욕조』.

책을 펼치니, 내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밑줄이나 메모 같은 흔적은 없다. 다행이다.

“선배는 어떻게 이런 책을 갖고 있어요?”

“이런 책이 뭔데?”

“아니, 음……, 아주 오래된 책이고, 문학 전공자들이나 알고 있는, 특히 누보로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알고 있는 책이요.”

“나도 시나 소설을 좀 읽는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

권 선배와 나는 광화문 사거리 방향으로 걷는다.

“헌 책이 기분 나쁘지 않으면, 내 집에 가서 책을 더 둘러볼래?”

권 선배의 제안에 나는 잠시 망설인다. 남의 집에 가는 일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학생 때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친구네 집에 들락거릴 나이는 아니다. 사실은 나이뿐 만은 아니다. 외간남자 집이 아닌가. 외간남자? 너무 고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단어인가? 나는 속으로 히죽 웃는다.

“가서 책 몇 권 골라봐. 가기 싫으면 말고. 부담 갖지 마. 나 혼자 사는 거 알지? 다른 식구들 없어. 아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좀 그런가?”

권 선배가 대단치 않게 말한다.

“집이 어딘데요?”

“대방동.”

“그러죠, 뭐. 중고서점에서 몇 만원에나 구할 수 있는 책들을 그냥 얻으면 저야 좋죠. 개이득이죠.”

“두 사람이니까 택시 잡자.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게 개이득이야. 지하철 타고 버스로 환승하고 하는 것보다.”


저녁나절의 어스름이 내리고 있다. 택시에서 내려, 조금 걸어 골목으로 들어가니 단독주택들이 있다. 구 도시, 올드 타운에 들어선 느낌. 더 정확한 표현은 지나간 시간대에 들어선 느낌.

붉은 벽돌 기둥에 나무대문인 집 앞에 권 선배가 선다. 양쪽기둥의 붉은 벽돌들이 깨져가고 빗살무늬 나무대문도 몇 군데는 삭아서 덜렁대고 있다. 권 선배가 주머니에서 열쇠뭉치를 철컹거리며 꺼낸다. 나무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선다. 권 선배가 여기서 출퇴근을 했다는 건가? 아무렴은 어때. 작은 마당에는 흙과 잡초가 뒤엉켜 있다. 권 선배가 현관문도 열쇠로 열고 들어간다. 현관 안에는 남자 슬리퍼와 운동화가 어질러져 있다. 나는 권 선배를 따라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선다.

권 선배가 조명 스위치를 켰는데도 거실이 어두침침하다.

“저 손 좀 닦으려고……, 화장실은 어디예요?”

권 선배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는, 어떤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집안을 살피며 발걸음을 옮긴다. 신전에나 있을 법한 엄청난 두께의 기둥이 거실 양쪽에 위압적으로 서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검은 벽에 그림이 있는데, 목장풍경이다. 원경에는 첨탑이 있는 교회건물과 뾰족지붕 건물들이 그려져 있고 근경에는 젖들이 늘어진 얼룩소 여러 마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다. 풀을 뜯는 건 아니고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늘어뜨린 젖소들. 조악한 벽화다. 집안에 기둥이며 벽화라니. 거실 중앙에는 유리탁자가 있고, 등받이와 팔걸이에 조각장식이 화려한 나무의자들 일고여덟 개가 둘러싸고 있다. 좌석의 가죽이 찢어져 쿠션 내용물을 삐질삐질 토해내고 있다. 유리탁자 건너편으로 옛날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와 키보드 여러 세트가 전선들과 뒤엉켜 널려 있다. 크고 작은 온갖 종이가방들과 택배 박스들이 산만하게 쌓여 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지만 불이 들어오는 조명은 두어 개다. 거실 조명이 밝지 못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가구에 먼지가 쌓여 있다. 권 선배가 들어간 방 말고도 방이 세 개나 더 있지만 방문은 꽉 닫혀 있다.

기이하고 불쾌한 느낌이 내 목덜미로 스멀스멀 들러붙는다. 이렇게 사는 집도 있나? 이렇게 사는 집도 있겠지만 남에게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싶나? 권 선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권 선배가 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게 맞나? 집안 전체에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욕실 문 앞에서 벽면의 스위치를 켠다. 문을 열고 슬리퍼를 신고 들어간다. 욕실 안의 조명도 조도가 낮다. 커다랗고 누런 욕조가 드러누워 있다. 욕실에 비해서 지나치게 큰 욕조다. 커다란 구덩이처럼 보이는 욕조가 더없이 그로테스크하다. 욕조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거울은 물때와 얼룩이 심해서 내 얼굴높이 부분은 거의 비치지도 않는다. 비누통에 말라비틀어진 비누조각들이 잔뜩 있어서 손도 대기 싫다. 세면대는 검은 곰팡이가 번져오르고 있다. 나는 어깨에 멘 면가방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애쓰면서 수도꼭지를 튼다. 비누 없이 물로만 손을 씻는다. 변기 뚜껑이 덮여 있지만 절대로, 정말 절대로, 열고 싶지 않다. 공포의 근원지 같다. 소변 볼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이 욕실 안에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아주 깊고 깊은 심연에 들어온 것 같다. 결국 ‘욕조’ 때문에 여기까지, 책에 낚여서 여기까지 오게 되다니. 나야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권 선배는 만날 때마다 사람이 달라진다. 대체 어떤 사람이야? 권 선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벽을 꽉 채운 높이의 옷 행거에 옷들이 엉켜서 더미처럼 걸려 있다. 바로 꿈틀거리며 몰려나올 좀비들 같다. 책꽂이는 없고 장식장인지 선반인지 두 단에 책들을 엉성하게 꽂아놓았다. 책등이 탈색되어 제목을 금방 읽을 수 없는 책들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고, 종이묶음들이 책들 사이에 끼워져 있다.

이런 집에 나를 왜 데리고 왔지? 발가락들이 오그라든다. 이 집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지고야 말 것 같다.

권 선배는 책상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뒤적거리고 있다. 비니를 벗어서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십자가 바로 아래, 책상 위에는 조각상이 놓여 있다. 무슨 조각상이지?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조각상을 응시한다. 족히 4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남녀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뒤얽혀 성교하는 조각상이다.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조각상 아래에는 필기구와 무슨 서류와 우편물 들이 뒤섞여서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책꽂이 살펴봐.”

권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면서 서류인지 종이인지 계속 뒤적거린다.

세상의 모든 집들이 나의 할머니가 관리해주던 우리 집처럼 깨끗하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네, 라고 대답한다. 어정쩡하게 서서 선반의 책들을 둘러보지만, 뭘 살펴볼 게 있나? 이 방에서 뚜생의 『욕조』가 정말 나왔는지도 의문이다. 어디로 봐서 책 정리를 하던 방인가?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몇 권의 책들이 석고처럼 굳어 있는데. 아랫단 선반에는 비디오테이프들이 수십 개 꽂혀 있다. 점점 더 불쾌해지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권 선배가 무슨 영수증 같은 것들을 여전히 만지작거리다가 나를 바라보고 씨익, 웃는다.

“갖고 싶은 책 없어?”

방바닥이 출렁거리는 것 같아 나는 발아래를 내려다본다. 순간 뒤통수가 섬뜩하다. 고개를 획 돌리니, 권 선배가 내 뒤에 바짝 서 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돌아서면서 몸을 떼어낸다.

“왜 이렇게 놀라?”

권 선배가 태연하게 미소 짓는다.

“민주 씨, 있잖아.”

권 선배가 나를 와락 껴안는다. 내 심장이 딱 멈춘다.

“왜 이렇게 긴장해?”

권 선배가 포옹을 풀고 두 팔로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니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오래됐잖아.”

권 선배의 눈빛이 더없이 밝게 빛난다. 방안의 조명은 더 어두워진 것 같다. 권 선배가 다시 나를 힘껏 껴안는다. 권 선배가 커다랗고 뜨끈한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고 토닥이고 또 쓰다듬는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바지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든다.

“나도 민주 씨 좋아해. 그러니까 집까지 데려왔지.”

권 선배가 더 뜨거워진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는다.

“긴장하지 마. 왜 이래? 니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다 알고 있어. 신나서 내 집까지 따라와서는 이렇게 긴장하다니.”

권 선배가 희죽거리며 포옹을 푼다. 뜨끈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입을 맞추려는 듯 얼굴을 들이미는데, 내 어깨의 면가방이 미끄러져 내린다. 나는 ‘아, 잠깐만요, 가방 좀’ 하면서 왼손으로 권 선배의 가슴팍을 살짝 떠밀면서 동시에 오른손에 쥔 휴대폰을 들어올려 권 선배의 쇄골을 힘껏 가격한다. 권 선배가 윽,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린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가고 권 선배가 휘청거리더니, 뒤통수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친다. 바닥으로 풀썩 쓰러진다. 나는 휴대폰을 더 단단히 그러쥐고, 면가방을 어깨에 고쳐 멘다. 방을 나오면서 권 선배를 뒤돌아본다. 금방 몸을 일으켜 쫓아올지 모른다. 나는 매우 기민하게 그러나 침착하게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나무대문을 열고 뛰쳐나온다.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한동안 달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할머니 팬티 덕분이다. 할머니 팬티가 나에게 용기와 침착을 준 것이다. 세상의 도처에는 예상치 못한 지뢰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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