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일회용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다.
하루 종일 내 엉덩이를 감싸며 나를 보호해주던 김덕자 팬티를 벗어 빨면서 할머니 생각을 했다. 샤워를 마치고 김덕자 팬티를 또 꺼내 입을 때도 할머니 생각을 했다. 할머니 지금 뭐하세요? 주무세요? 편안하신 거죠? 그런 거 맞죠?
휴대폰이 울린다. 용태다.
“오늘 피부과 갔다 왔어. 너 말대로 더 이상 병원에 안 갈 거야. 누구도 나를 고칠 수 없어. 불치병이야.”
“불치병 아닐 걸? 너만이 너를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용태의 한숨 소리가 또 들려온다.
“너를 믿어. 넌 단군의 자손 맞잖아. 이미 웅녀가 되었다고. 인내할 만큼 인내했다고. 굴 밖으로 나와서 과감하게 그림을 시작해.”
“웅녀가 됐다고? 굴 밖으로 나오라고?”
용태가 낄낄거리더니 곧바로 또 한숨을 내쉰다. 한숨에, 한숨에…… 또 한숨. 용태가 뱉어낸 한숨은 어딘가에 태산으로 쌓여 있을 거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림을 시작해?”
“이 상황이 뭔데? 언제 상황이 바뀐 적 있어? 언제 바뀔 것 같아?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둬.”
용태가 침묵한다. 용태는 나보다 더 신중하고 나보다 더 소심하다.
“너를 구원할 자는 너밖에 없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하기 싫은 일 그만두고 그림학원 다녀. 전문대학을 가던지.”
“매달 고정지출비는 어쩌고?”
“그것 때문에 너 인생을 계속 푸른 수염과 두드러기에 약탈당할 거니? 또 다른 증상이 생길 수도 있어.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야. 마음이 괴로워서 몸이 그런 거야. 너도 다 알잖아. 생활비가 겁나는 건 당연한데, 시간제 알바로 어떻게 해결될 거야. 즐거운 삶을 살자. 비닐봉지처럼 종이컵처럼 사람도 일회용 인생인데, 살기 싫어하면서 사는 건, 진짜…… 너무 슬픈 거야.”
용태가 나지막하고 희미하게 히죽거린다.
“인생을 겁내면, 인생 끝난 거야. 용기를 내봐. 우리 인생의 기회들을 다 쓴 게 아냐. 더 좋은 기회들이 우리 앞에 있어. 이건 우리 할머니가 너하고 나한테 해주는 조언이야.”
나는 내가 입고 있는 할머니 팬티를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