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요즈음 <아는형님>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어 브런치에 옮겨 봅니다.
1. <황금어장>
JTBC<아는형님>이 첫 방송을 탔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종잡을 수 없는, 최근에 보기 드문 프로그램이 나와서인지 주목을 조금 끌고 있다. 멤버들 스스로도 SBS<X맨>이나 KBS2<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공포의 쿵쿵따>가 연상된다며 프로그램의 복고 코드를 짚었는데,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MBC<황금어장>이었다. 강호동이 출연했고 상황극(꽁트)이 자주 나온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더불어 전체 포맷이 정교하게 짜이지 않고 이것저것 해보면서 감을 찾아가던 <황금어장> 초창기의 냄새가 강했기 때문이다. 제목도 <아는 형님>이다. 정체가 불분명해 어떤 프로그램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잘 풀리지 않는 것들은 버리고 좋은 것은 흡수하며 변신해 가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이렇게 무엇이든 담으려면 황금어장처럼 개방적인 이름이어야 한다. 실제 <아는 형님>은 과거 MBC<황금어장>을 만들었던 여운혁 PD의 작품이다. 많은 예능 프로그램을 성공시킨 명성이 있는 PD의 신작이다. 어쩌면 그의 기억 속에는 ‘완벽한 사전 기획보다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거리다 보면 가장 좋은 답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PD보다는 시청자가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팍도사>나 <라디오스타> 등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요즈음은 기획 단계부터 공을 많이 들인다. 그래서 방송이 시작될 때면 정체성, 포맷, 디테일이 꼼꼼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전보다 기획안 작성 자체가 중요해졌다. 예전에는 제목과 출연자만 적고 내용에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만 썼는데도 기획안이 통과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하지만 전보다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무엇을 확신하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얼마의 위험 부담이 있는 포맷인지 알아야 한다. PD 입장에선 FEEL만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진 셈이다
시청자들도 전처럼 잘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 두 번 보고 노잼이면 다시 찾지 않는다. 정교한 포맷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보며 눈이 높아졌을 수도 있다. 또 채널이 늘어나며 굳이 인내하며 봐줄 이유가 없어져서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은 전처럼 제작자들에 너그럽지 않다. 제작자들은 한 눈에 마음을 빼앗아야 한다. 처음부터 잘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아는형님>이 남다른 길을 가니 관심이 자꾸 간다.
2. <투유프로젝트 슈가맨>
JTBC는 가장 기다려주지 않는 방송사로 잘 알려져 있다. 프로그램이 재미없으면 가차 없이 폐지해버리는 스타일이다. <연쇄쇼핑가족>, <내나이가어때서>, <학교다녀오겠습니다>, <나홀로연애중> 등 개국 5년 치고 상당히 많은 프로그램이 문을 닫았다. 대신 프로그램의 회전률이 높고 신선도가 높다. JTBC는 재미없는 방송이 좋아지길 오래 기다리느니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 같다. 못난이를 고치느니 새로 하나 낳겠다는 심산이다. 또 JTBC는 포맷이 꽉 차있는 프로그램을 주로 만들어왔다. 시뮬레이션까지 돌려 만드는지 틈새가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장치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다. 성공한 프로그램이 <히든싱어>고 실패한 프로그램(파일럿)이 <슈가맨>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슈가맨>이 아직 방송하고 있는 것은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파일럿은 성공적이지 못 했다. 혹평이 이어졌다. 그런데 정규화되었다. 순전히 유재석의 힘이다. JTBC 입장에선 유재석과 함께 하는 것이 채널 이미지에도 좋다. 파이럿만 하고 버리기엔 뼈아팠을 거다. 더불어 하늘이 준 기회가 있었다. 바로 SBS<심폐소생송>이 <슈가맨>의 장점을 취해 버젓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후 정규화에 실패한 일이 벌어졌다. <슈가맨>은 역으로 자신을 모델로 삼았던 프로그램을 자기 혁신의 모델로 삼았다. 극적으로 몸을 추슬렀다. 찾는 과정을 버리고, 역주행송을 만들 가수의 급을 높여 공연을 보강했다. 또 슈가맨에 의존하지 않고 멤버들 간의 토크를 강화했다. 요즈음에 와선 <슈가맨>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유재석의 진행도 매끄러워졌고 포맷도 안정을 찾았다. 기다려주면 제 갈 길을 찾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슈가맨>이 입증한 셈이다. 그리고 빠른 폐지와 지속적인 신규 프로그램 공급이라는 형태 또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는형님>은 점점 더 시스템화되는 제작 관행들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나 정말 그게 좋은 방법인가? 소위 대박 프로그램이라 하는 것들을 보면 꼭 처음부터 잘 된 것은 아니다. MBC<무한도전>은 기다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요즈음 프로그램들이 ‘고만고만’하고 오십보백보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빠어디가>가 나오면 <슈퍼맨이돌아왔다>와 <오마이베이비>가 따라 나오는 시대다.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다양성이 늘었다고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또 너무 다 만들어 놓고 시작해 시청자들의 반응을 수용하기가 어려워진 면이 있다. 프로그램은 생물과도 같은데 지금 방송계는 이것을 박제화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프로그램을 주목한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하면 오리지널 문법의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프로그램의 자생력과 진화를 믿어주는 분위기가 더 조성될지 모른다. 물론 잘 안 되면 구식 문법의 종말을 고하는 ‘올드보이’로 기억될 수도 있지만.
3. MBC 브라질 월드컵 해설 (김성주, 안정환 라인업)
<아는 형님>이 포맷을 버리는 대신 강화한 것은 캐릭터다. 뭘 할지 모르지만 관심 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뭔가 해낼지 모르는 기대감을 줄 수 있다. 강호동, 이수근 조합을 다시 보는 것이 반갑다. 그들의 케미가 아직 살아있다. 강호동은 예능 원시인으로 캐릭터 방향을 잡았다. 서장훈은 아직 더 끌어낼 캐릭터가 남아있는 사람이다. 희철, 김영철이 부족한 공간을 메워 줄 서브 역할을 할 예정이다. <라디오스타>는 형식은 없었지만 캐릭터들의 방향은 있었다. 사소한 자존심 싸움을 하면서 경쟁하는 MC들, B급 게스트와 물고 뜯는 한판은 기존 정숙하고 예의바른 토크쇼에서 한 발 벗어나 신선함을 주었다. 누가 나와도 MC 때문에 보는 이상한 토크쇼가 <라디오스타>다.
<아는형님>들의 대화하는 덩치는 크지만 감성은 고등학생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제 사회에 나와 모두 제 얼굴을 가리고 분칠하고 차려입고 예의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풀 곳은 동네 형들이 모여 있는 ‘당구장’이다. 당구장에 가면 아직 고등학생 정서로 살아가고 있는 아는 형님들이 있다. 남자들은 그런 곳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MBC의 2014 브라질 월드컵 중계가 떠올랐다.
2002년부터 신문선 해설위원은 차범근 감독에게 패권을 넘겨주었다. 상대적으로 애국적이고 대중적인 신문선 해설위원과 달리 차 감독은 축구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우리가 잘못 했으면 억지로 편들지 않았고 못 하는 선수들에게 쌍욕을 퍼부어 댈 시청자들 앞에서 쓰러져 넘어져 있는 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한국 축구가 이기는 것을 바라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축구를 사랑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하는 차범근의 언어는 이제 조금 더 자립하고 또 남 눈치 안 보고 살고 싶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 동안 차범근 감독의 청교도적인 해설이 주목을 받았다. 이제 시청자는 말하자면 술 먹고 소리 지르며 무식하게 시청하지 말고 조금 더 점잖고 우아하게 시청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던 와중에 대중은 차범근 해설위원에 질려갔다. 좀 거칠고 너티(naughty)하게 보면 안돼? 2014년은 수성하려는 차범근과 왕좌를 뺏으려는 신흥 해설자들의 대결이었다. 안정환, 송종국의 해설은 거칠다. 부정확한 표현도 있고 흥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시청자들의 마음과 더 가까운 게 사실이다. 이들의 중계를 들으면 마치 당구장에서 아는 형들과 자장면 먹으면서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는형님>은 당구장에 모였는데 오늘 뭐할지 모르는 분위기다. 언제든 철수할 수 있는 간이 스튜디오 앞에 선 이들은 스스로도 방향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에 끼고 싶은 것은 제멋대로 사는 그 동네 형들에 끼고 싶은 중학생들의 심정과 같다. 뭐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있는 게 즐거운 집단이다. 그래서 형식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관심이 많다. 더 기다려줄 분위기다. 별 내용 아니어도 그래서 꼭 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도 그냥 틀어놓으면 볼만하다는 식이다. <아는형님>은 어떤 식으로 발전할까? 어쩌면 이들은 <무한도전>과 <1박2일>과 같이 밖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조금 더 지켜볼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전망을 어둡게 보고 싶진 않다. 나 역시 마음 밑바닥에 알 수 없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