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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Aug 19. 2017

170일 파업에서 배운 두 가지

[후퇴에 후퇴]

2011년은 MBC가 본격적으로 망가진 해였다. 김재철 사장이 들어온 지 1년 만에 회사는 상상조차 못 했던 최악으로 치달았다.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 일선에선 망가트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간의 치열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내 곳곳에 불합리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상의 비정상화가 가속화되었고 그 흐름을 막는 게 버거웠다.    


2010년 사장 선임 반대로 싸운 39일 파업에 이어 2012년 다시 파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사내외 온도 차는 컸다. 밖에선 정권이 끝나가니 분위기에 영합하려 한다 했고 또 너무 오래 참았다며 조소했다. 반면 내부적으론 전의(戰意)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다들 이길 수 있을까 조심스러웠다. 당시 파업 슬로건이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였다. 질기고 독하게 오래 싸워야 한다는, 또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냉대에 창피해하지만 말고 자신감을 찾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후배들이 다 물러나라 하니 지도자로서 면이 서질 않아 그만두는 낭만의 시대가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였다. 무능과 부도덕이 드러나도 힘이 있으니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했다. 정권의 방송 장악 의지가 대단했다. 요즘 밝혀지고 있지만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방향을 틀겠다는 권력자들을 앞에 두고 일개 노동자들의 합법적인 싸움은 무력했다.     


눈이 있지만 입이 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방송에는 나가지 않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격한 퇴행 과정을 두루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만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 직감했다. 그래도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했다.     


[각자의 싸움]

파업 기간 월급이 끊겼지만 일 할 때보다 바빴다. 집회에 참여하고 번화가에서 전단을 돌렸다. 젊은 사람들은 UCC 등을 만들며 온라인 투쟁도 했다. 방송이 아니어도 목소리를 전할 플랫폼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파업하는 방송인들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당시 우리에겐 기회였지만 여러모로 방송의 위기를 실감했다. 한편으로 방송의 위력은 여전했다. 마이크 없는 방송인이 얼마나 무력한지 체감하면서 왜 싸워야 하는지 새삼 확인하기도 했다.       


집에선 보통 돈으로 채워야 할 것들을 몸으로 채웠다. 파업이 길어지자 노후 적금을 깨고, 유학을 보낸 자식을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고, 몰래 대리운전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근무 조건이 좋다고는 하나 개인마다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6개월 이상을 일하지 않고 쓸 돈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얼마 없을 거다. 신혼이었던 나는 결혼 후 첫 생일날 아내와 텅 빈 운동장을 오랫동안 함께 걸었다.    


[기로(岐路)]

싸움의 끝이 어디인지 기약이 없었다. 가열차게 싸웠지만 170일은 꽤 긴 시간이었다. 겨울에 시작한 파업이 여름까지 가자 노조원들은 한겨울 남한산성에 갇힌 병사들처럼 지쳐갔다. 당시 유력한 대선 주자 박근혜 후보가 파업을 풀면 방송을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노조 집행부는 믿어보자고 했다. 나는 당시 여당을 보며, 카르타고인에게 무기를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말하고 무기를 버리자 성을 비우고 떠나라 했던 로마인들이 떠올랐다. 카르타고는 뒤늦게 후회하며 항전했고, 로마는 무기 없이 맨몸으로 싸운 그들을 절멸시켰다. 노조원들은 공개홀에 모여 박근혜의 말을 믿느니 싸우다 죽자고 했다. 집행부가 말리고 조직원이 싸우자는 노동조합도 흔치 않을 것이다. 굶어 죽는다고 사지(死地)로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곧 대선이었다. 돌아가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였다.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때였다. 언론인이자 노동자로서 정치와 무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편파적인 방송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170일 파업을 중단하고 올라갔지만 현장에서 싸우자는 뜻은 물거품이 되었다. 경영진은 많은 기자와 PD를 책상과 의자만 있는 방들로 보냈다. 특히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타지역에 사무실까지 얻어 쫓아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일 때 많은 동료가 신천 MBC아카데미에서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배워야 했다. 또 여러 선배가 해고되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대선이 끝나자 탄압은 더 그악스러워졌다.    


[다시 각자의 싸움]

소리없는 학살. 지난 4년간 MBC에서 벌어진 일을 표현하자면 그렇다. 대오는 깨지고 사람들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회사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시켰고 거부하면 빼내고 그 자리를 경력 사원으로 채웠다.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따위의 질문을 받고 들어왔다는 경력 기자와 PD는 대부분 조직에 충성심을 보이고자 최선을 다했다.(경력 입사자 중에는 정체성을 숨기고 들어와 커밍아웃하고 함께 싸운 이들도 꽤 되었다. 그들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다.) 1라운드가 ‘나쁜 짓은 하지 않는 MBC’라면 2라운드는 ‘나쁜 짓도 하는 MBC’였다. 그래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싸움이라 생각하면서도 시민들로부터 비난 받는 회사에서 월급 받고 산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매일 출근해서 일할 때마다 내가 부역자의 부속품 노릇을 하는지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야 했다. 그게 혼란스러울 때면 새벽에 여러 번 깨야 했다. 편성에 있다 보니 손에 피가 묻을 일이 많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놓치지 않고 보고 들었다.
     

대학 때는 ‘민중 독재’라는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소수의 제국주의 협력자가 큰 식민지를 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일반 대중의 자발적 복종이 필요했다는 논지였다. 전에는 그런 것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극적인 반전의 시작]

아무도 10년의 퇴행을 돌려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2016년 늦가을. 시민들이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짙은 어둠이 아침과 가장 가깝다는 말을 실감했다. 박근혜 정권을 두둔하던 신문, 방송이 시민들 편에 돌아서기 시작했다. 가장 어려운 시절 고비 고비마다 침묵했던 방송사가 값싼 사과를 제일 먼저 하고 정의로운 방송을 자처하는 것을 보니 속이 거북했다. 가장 지탄받는 방송사에 다니는 처지라, 그분들의 정의로운 행보에 토를 달수가 없어 혼자서만 슬퍼했다.

가장 열심히 싸웠던 젊은 기자와 PD들이 MBC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돌을 맞고 있는 것은 사람들 눈에는 사필귀정이었겠지만 내가 보기엔 아이러니였다. 시민들은 기자나 PD의 얼굴이 아닌 로고를 보고 피아를 식별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니라고 속으로 외쳐도 사람들 입에선 그저 또 다른 김재철, 안광한, 김장겸으로 불렸다. MBC 사람들은 TV 속에서 냉대받는 동료를 보며, 그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JTBC를 보며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렸다.     

한편으로 그 장면은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은 엘리트 집단이 ‘억울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으로 남을 것도 같았다. 이제야 곳곳에서 억울함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끄러운 사람들]

촛불 혁명이 시작되고 나서도 많은 MBC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망설였다. 옆 사람이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확인한 지 오래 되었고, 또 그간 회사 생활을 하며 조금씩은 때가 묻은 게 못내 부끄러워서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선 광주 학살을 뒤로하고 딸에게 줄 꽃신을 사서 돌아가다 마음이 부대껴 울먹이는 송강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회사에서 자주 봤던 얼굴이다. 자신도 공범자라며 부끄럽고 미안해 눈물을 흘리는 김민식 선배의 얼굴이다. 가장 열심히 싸운 사람이 그럴 텐데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더 착잡하다. 세상이 바뀌면 로비에서 만세라도 부를 줄 알았는데 막상 축제의 시간이 왔는데도 어디로 숨고만 싶다.

다섯 살 아들이 ‘왜 아빠는 MBC 다니면서 JTBC 뉴스만 보냐’고 묻는다. 할 말이 없다. 시민들도 이제 JTBC가 있으니 MBC는 필요 없다고 한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언론인으로 가득 찬 MBC를 쉽게 버리려는 시민들의 계산법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간 기회가 왔을 때 믿음을 다 얻지 못  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관심이 능사인지 우는 마음으로 묻고 싶다.


[뜻밖의 소득]

회사가 정상이었다면 다들 일만 열심히 했겠지만 비정상이어서 배운 것도 많다. 여기서는 절실히 느낀 민주주의의 가치나 방송의 역할 등의 큰 의미 말고 살면서 느낀 소소한 감정의 변화를 얘기할까 한다.    


파업이 한 창이던 때, 젊은 PD들이 모여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런 괴물이 되지 않을 것인가?‘     


몇 년 전만 해도 멀쩡한 선배였던 사람들이 줄을 갈아타고 동료와 후배들을 잡는 백정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승진에 밀리면 퇴직해야 하는 곳도, 성공한다고 월급이 두 배로 뛰는 곳도 아닌데 왜 저럴까 싶었다. 우리끼리 자신의 성향을 기준으로 자신이 최악의 인간이 되면 저들 중 누구와 비슷해질까 상상해보는 놀이를 하며 몸서리치기도 했다. 저들처럼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것 이상으로 저들을 이해해보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게 저들처럼 되지 않는 길을 찾을 방도라 생각했다.    


기자나 PD는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흔히 말하는 전문직이 아니다.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라 회사를 나서면 개원, 개소할 수도 없다. 그냥 퇴사하면 기자도 PD도 아니다. 추억 많은 삶을 살았지만 떠날 때는 뭐라도 들고 가고 싶을까? 성공해서 큰돈을 번 것도 아니고 후배들이 그의 업적을 기억해주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성공의 기억은 쉽게 증발하는 게 방송계다. 대박을 터뜨려도 몇 년 지나면 회사 들어와 한 게 뭐 있냐는 얘기 듣기 십상이다. 특히 무능하다면 기억에 남긴 더 어렵다. 이곳이 자유로워 보여도 사람들 평가가 모진 곳이다. 일 못 하면 견디기 어려워 월급 깎이는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잘하려고 한다.     


그래서 뭐라도 좀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작동하면 어이없게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리 욕심’을 내는 걸까? 그렇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유독 인사를 안 한다고 후배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후배들의 허리를 꺾어서라도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딱하게도 후배들이 절대 주지 않았던 게 인정의 눈빛이었다. 일을 먼저 마치고 퇴직한 부역자들의 뒷모습이 하나 같이 쓸쓸했다. 그리고 한 가지 든 결정적인 생각.    


‘아... 저들은 돌아갈 집이 없구나....’    


길 잃은 아이들이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싶다. 그저 탈선해서 뭔가 일을 저지르고 소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확인받고 싶은 반항기 아이들의 모습과 다른 바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이상이 아니라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바빠서 집을 돌보기 어려운 게 방송 일이다. 그럼에도 엇나가면 그 결과가 참담하다.     


2012년이 흑룡의 해라 우리나라에선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태어났다지만, 우리 회사에선 2013년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불안해 망설였던 임신을 파업이 끝났을 때 하게 된 것도 있고, 바빠서 못 만들었던 아이를 파업 덕분에 만들었기 때문도 있다.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에 민감한 PD들이라 바쁜 와중에도 육아에 열심이다. 비행청소년 하나를 저지하는 것 이상으로 또 다른 케빈을 키워내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파업이 준 첫 번째 깨달음.     


“집으로 돌아가라..."    


파업이 끝나고 회사에 올라가니 PD들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하는 강경책과 회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는 회유책이 동시에 들어왔다. 화합을 강조하는 각종 연수와 부서 회식을 빈번하게 강요당했다. 그래서 한동안 점심시간이 되면 선약이 있다며 무조건 뛰쳐나가는 일이 많았다. 벽보고 밥을 먹는 게 편했다. 여의도에 있을 때는 둔치에서 한강을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 직원들을 종종 봤다. 굳이 다가가 말을 걸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끼리는 상처를 달래 주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을 그리워했지만 그건 다시 못 올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어서 혼밥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혼자 있는 시간이 지닌 가치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관계의 그물에서 떨어져 나가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막상 조금 떨어져 나가도 별일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관계에 중독되어 불필요한, 또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만남을 가져왔던 것은 아닐까?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운동하고 책을 읽고 기도나 명상을 하기 좋은 시간이다. 정신적으로 충전을 하니 가끔 참석하는 자리에서는 전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집에 돌아와도 감정적으로 더 줄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 <마션>을 보며 여의도를 유영하는 단독자의 삶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다보니 잘난 사람이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괴물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파업이 준 두 번째 깨달음.    

 

“나에게 돌아가라...”    


[우리 모두의 숙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함께하지 못 했다는 말. 나를 사랑하지만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다는 말.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이해받기 어려운 시대다. 그 말 자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종의 적폐라면 적폐일까? 그건 우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가정과 나에게 돌아갈 때이다.    


물론 여전히 너무 바쁘고 너무 힘겨워 가족과 함께하지 못 하고 자신을 돌보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다. 그래서 더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송이 할 일이 많이 남았다. MBC 노동조합은 9월 초에 다시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사회와 가정과 나 모두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싸움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 브런치팀의 연재 매거진 제안을 받고 큰 기대 없이 글을 썼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보고 간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내 글의 가치보다는 운영자들이 모바일과 PC에서 좋은 곳에 자리를 깔아주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MBC 얘기를 어떻게라도 여기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 내용이 전체 글의 3/4이 지난 시점에 등장하는 이상한 글을 쓰게 되었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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