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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Aug 26. 2017

30년 후에 건네줄 편지쓰기

아이를 위한 기록 1

[남겨진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영화 <빌리 엘리어트>(스포일러 有)는 춤에 빠진 탄광촌 소년 빌리(제이미 벨)가 로얄 발레스쿨에 들어가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다. 대처 시대 노동자들에 짙게 드리워진 파업, 실업의 고통과 천진난만한 소년이 추는 춤의 낭만이 대조를 이루며, 거친 아버지와 형이 강요하는 남성의 세계와 발레를 하고 싶은 소년의 꿈이 또한 대조를 이룬다. 경직된 시대를 상징하듯 빌리 가족에게는 엄마의 자리가 부재하다.(할머니가 등장하지만 치매 환자고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여성성의 상실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그래서 그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그 결핍된 여성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고 그래서 소년 빌리는 절망의 시대에 춤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가족의 반대에 막혀 오디션을 볼 수 없는 빌리는 답답함에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동네를 떠다닌다. 그 춤은 무력해 보이지만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희망은 그렇게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바꿀 힘을 숨기고 있다.    

어릴 적 죽은 엄마는 커서 읽으라며 빌리에게 편지를 남겼다. 빌리는 발레 오디션 연습 중에 그 편지를 꺼내 선생인 월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에게 건넨다. 선생님이 소리 내 읽다 멈칫하자 곧바로 빌리가 따라 읽는다. 이미 수차례 읽어 이제는 외워버린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다. 편지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긴 시간을 두고 엄마와 소년이 계속 대화할 수 있다는 건 슬프기도 하지만 다행이기도하다. 소년이 엄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상실된 것들을 만회할 기회이기도 하다. 소년이 여성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 영화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빌리가 발레에 몰두하는 건 엉뚱해 보였을지 모른다. 춤은 잃어버린 엄마를 다시 찾는 열쇠다.     

늦은 것까진 아니지만, 이르지 않은 나이에 아이들이 생겼다. 가끔 아니 자주 부모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들 곁을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부모가 없어도 아이들이 부모의 손길을 느끼게 해줄 수는 없을까?    


[아빠는 호모 스크립투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빠로서 무엇을 해줄까 고민했다. 대단한 건 못 해줄 것 같고... 그래서 아이들을 잘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이 성장해 온 역사를 적어 성인이 되었을 때 보여주면 그때 자신을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당장 한 달 전의 아이 모습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6개월 전 아이의 동영상을 보면 저랬을 때가 있었구나 싶다. 망각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자주 써서 그때그때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또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죽을 때 자식들 손을 잡고 전할 ‘사랑한다.’는 말도 좋지만 인생에 겹겹이 쌓인 순간들과 맞닿아있는 수많은 모습의 사랑 고백을 전해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첫째 아이를 키우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 묻는다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던 어느 날을 뽑고 싶다. 나는 아들 녀석이 즐겨 듣는, <로보카 폴리>나 <라이언 킹> 등의 노래가 지겨워 슬쩍 음악을 바꿨다. 콜드플레이의 <Fix you>를 틀어놓고 가는데 당시 네 살인 녀석이 가만히 듣더니 ‘아빠 이 노래 참 좋다..’하는 것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내 아이가 좋아한다니 마음이 뜨거워졌다. 게다가 어린이집에 도착했는데 ‘아빠 노래 다 듣고 내리자...’한다. 학창 시절 버스를 타고 가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다 듣고 몇 정거장 지나 내렸던 기억이 있다. 터벅터벅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았다. 순간마다 느끼는 감흥을 무시하며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감성적인 면에서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또 뭉클해졌다. 그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과 아들이 남자로서 앞으로 견뎌야 하는 고단함이 겹쳐졌다. 차를 세우고 둘이 음악을 듣던 시간, 다 듣고는 씩 웃고 서둘러 내려 어린이집으로 뛰어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 이런 게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들을 시간이 지나면 다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디테일이 없다면 전해줄 감동도 없을 거다.     


[가늘고 길게]

그래서 아이들에 대해 한참을 써서 30년 후에 전해주자는 계획을 세웠다. 30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 내 나이가 되어, 이제 그들의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순간이 되었을 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시간은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다. 대학 때 역사를 전공하고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시간이라는 엄청난 존재의 등에 올라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많은 전문가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결정적인 시기를 유년기에서 찾는다. 자신의 비정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어릴 적 경험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출발점에서 겪은 충격들을 제대로 이해하면 인생 전체를 다시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그 사건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찾지 못하고 또 묻혀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 한다. 방송사 취업 준비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데 다들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애를 먹는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매일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보며 사는데 자신을 모르겠다고 할 때 마음 아프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스스로 기록하지 못 하는 때에 대신 아이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 만약 그들이 성인이 되어 막다른 골목에 있을 때 자신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건네준다면 보람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무척이나 디테일하게 썼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게 신기하고 놀라워 쓸 말이 참 많았다. 발달 상황, 병원 진료 기록, 당시 부모의 느낌을 상세하게 적었는데 솔직히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이 되었다.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바빠서 한번 놓치면 큰 숙제가 되어 있었다. 과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독자(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너무 많은 텍스트를 안겨주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을 읽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면 읽기도 전에 질려버릴 거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쓰기로 했다. 한 달 동안 있었던 일, 아이들의 발달 상황-그보다는 주목할 만한 변화, 아이들 개인별 성향이나 특징, 아이들의 환경 변화, 나의 생각이나 기분 등을 담는데 A4로 한두 장 정도로 쓰되 한 시간 안에 쓰는 것을 목표로 했다. 보통 날짜를 정해 잊지 않도록 신경을 쓰지만 되도록 시간이 있을 때 쓴다는 가벼운 마음을 지니기로 했다. 1장씩 30년 동안 쓴다면 나는 360편의 편지를 남길 것이고 360시간의 노력을 담을 거다. 노년에 그만한 시간을 들인다면 아이들에게 인생을 회고하는 360페이지의 편지를 쓸 수 있을까? 그런다 해도 꾸준히 쓰는 편지에 비해 질적으로 좋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복병]

쓰다 보니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육자로서의 부족함이 편지로 인해 여실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해준다. 내가 원했던 것과 더불어 내가 원하지 않았던 모습까지도.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 중요하게 생각해 공들였던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것뿐일지 모르며 그사이 아이에게 꼭 주었어야 하는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어릴 적 해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문제를 부모가 아무 조치 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거다. 내 편지들은 부모, 특히 나의 무지와 무관심, 능력 부족, 결함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할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마치 내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는 힘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아이들이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기록의 다양한 얼굴을 인상적으로 확인한 일이 전에 있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당시 막 출시되었던 6mm 디지털 캠코더를 산 적이 있다. 이것저것 많이 찍고 다녔다. 친구들과 영화 패러디도 만들고 가족의 행사도 담았다. 어느 날은 당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가지고 나가 그 날 하루를 찍기도 했다. 가끔 내 모습을 같이 담기도 했다. 그리고 사귀었던 친구와 헤어지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방을 정리하다 전에 찍었던 테이프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내 기억 속에만 있었던 구 여친의 모습을 다시 확인한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는데 나는 뜻밖의 대상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바로 화면 속에 있는 나 자신이었다. 거기에는 구 여친과 헤어진 후 다시는 꺼내지 않았던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서 있었다. 오래 만났기 때문에 특별한 관계가 만드는 화학 작용의 결과가 내 몸에 뱄을 거다. 하지만 그 관계가 사라지자 나의 어떤 부분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화면 속에 너무 다른 내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사람인가?’ 싶었다. 시간이란 게 무서워서 사람을 꽤 먼 곳까지 보내며, 기록은 당시 보지 못 했던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그때 생각했다.    


그 경험은 한편으로는 멜로물의 결같았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30년 후에 보게 될 편지는 공포물이 될 수도 있다. 한참을 쓰다가 어느 날 멈칫했다.

'내가 제 무덤을 파고 있구나...'

그날은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 언성을 높이며 모질 게 대한 날이었다. 밤에 혼자 앉아 반성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 이번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더 클수록 더 신중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리고 편지를 쓰는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이 편지는 아마 많은 것을 숨기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드러낼 텐데...    


[아이와의 영원한 대화]

하지만 그게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나에 대한 평가가 뭐가 중요한가 생각하니 결론이 빨리 났다. 편지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잘못 컸는지 정확하게 쓰여 있을 테니 바로 잡을 방법도 아이들이 정확하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라는 사람의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스스로 구원할 방도라도 쥐야하지 않을까?또 아이들은 그들의 오해로 부모나 세상 사이에 쌓아 놓은 장벽의 실체를 확인할 기회도 있을지 모른다. 철이 들기 전에 했던 여러 생각의 실제 모습을 보며 그게 관계를 어떻게 바꿨는지도 확인하면 성인이 되어 아이들은 우리와 또 세상과 화해를 할 수 있을 거다. 모든 가능성이 그 안에 있고 나는 아이들이 그것을 슬기롭게 사용할 것이라 믿어보자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지난 글을 다시 보며 수정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로얄 발레스쿨에 들어가고 장성하여 공연에 아버지와 형을 초대한다. 무대로 걸어나가는 그의 늠름한 뒷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강인한 근육이 뿜어내는 힘과 우아한 자세를 그는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빌리의 춤은 그와 시대를 함께 산 사람들에게 치유의 몸짓을 짓고 있다. 객석에 앉은 아버지와 형은 늙었고 엄마의 기억은 더 흐릿해졌겠지만, 그는 모두를 품고 앞으로 가고 있다. 내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가족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세상이 모질 게 굴 때 그리고 삶이 무너질 것처럼 위태할 때 헤쳐 나갈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영원히 이야기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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