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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Dec 23. 2017

아이를 믿으세요.

영화<룸> 리뷰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2016년 개봉한 아일랜드 영화<룸>에서 조이(브리 라슨)는 한 남자 닉(숀 브리저스)에게 납치되어 7년 동안 작은 방에 갇혀 있다. 감금 생활 동안 조이는 닉의 아이 잭을 낳아 좁은 공간에서 키우고 있다. 둘의 생활이 참담하다. 천장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양은 턱없이 부족하고 좁은 공간에서 지내다보니 운동도 부족하다. 남자가 전해주는 음식에만 의존하니 영양상태도 좋지 않다. 그런 열악한 상황은 잭의 창백하고 앙상한 몸이 말해주고 있다.     

영화<룸>은 초반에 탈출기가 아닌 생존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래서 좁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엄마의 처절한 육아 이야기가 밀도 있게 전개된다. 엄마는 그 안에서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교육을 한다. 바깥세상을 모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 방이고 세상은 오직 엄마를 통해서만 설명된다. 그건 모든 아이가 엄마의 자궁이라는 공간에서 성장하고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전적으로 이해하는 초기 과정을 은유하는 듯하다. 원래 아이는 세상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아이의 눈에 맞게 세상을 설명해줘야 한다. 설령 왜곡이 있더라도 그건 큰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가피하다. 갇혀 있는 상태를 설명해야 하는 조이의 입장이 만만치 않다. 매번 상상을 통해 새롭게 세상을 구성해야 하는 평범한 부모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잭을 보면 연민이 절로 생긴다. 긴 머리에 창백한 얼굴, 얇은 다리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아이는 격리된 곳에서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좁은 공간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살면 짐승이 되진 않을까? 그리고 밖에 나간다면 그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엄마 조이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은 전쟁과도 같다. 아이를 제대로 성장시켜야 하는 부담이 크다. 엄마에게도 방은 좁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육아에 묶여있는 여느 엄마의 처지와 같다.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엄마는 힘을 내야한다. 한편으로 잭이 있으니 힘을 낼 수 있다.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하루 종일 TV만 보다 좀비가 되었을지 모른다. 모든 엄마가 아이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에 힘겨워하지만 아이의 존재로 인해 힘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고통을 받은 한 모자의 이야기를 통해 엄마와 아이 간의 유착 관계를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소재만 보면 이런 사건에서 보편성을 끌어오려는 시도가 다소 온당하지 않은 것도 같지만 이야기가 펼쳐놓는 은유의 체계를 보면 그 시선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조이는 점점 성장해가는 잭을 보며 그 공간에서 더 이상 아이를 둘 수 없다는 절박한 감정을 느낀다. 모든 것이 두렵지만 아이는 이제 세상에 나가야 한다. 고민 끝에 조이는 탈출을 감행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진실을 말한다. 막상 진짜를 설명하자 아이는 혼란스러워하고 주저한다. 다섯 살 아이에게 진실의 무게는 너무 무겁고 그래서 두렵다. 어린, 그래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아이와 함께 탈출한다는 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조이는 자신을 가둔 남자 닉에게 잭이 고열이 난다고 하고 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실패한다. 다음으론 잭이 죽었다고 하며 닉에게 아이를 밖에 나가 묻어주라 요구한다. 닉은 카펫으로 아이를 둘둘 말아 차에 싣고 숲으로 향하는데 아이는 별안간 트럭에서 뛰어내려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근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구조가 되고 닉은 도망치지만 경찰의 수색에 덜미를 잡힌다. 잭의 노력으로 엄마도 그 좁은 방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니 여기서 시작된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영화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가 바깥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로 모아졌다. 잭에게 세상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다.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한다. 낯선 사람, 자동차, 넓은 공간, 그리고 공기까지. 또 계단을 잘 걷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다. 새로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자꾸 위축되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하지만 영화는 뜻밖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오랜 감금생활에 지쳐있던 엄마 조이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바깥세상은 낯선 곳이었다. 가족들의 일상도 조이처럼 일그러져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함께 복원해야 한다. 지난 시절을 기억하고 또 정리하는 일이 순조롭지 않다. 기자가 물었다.     


‘왜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같이 살았나요? 그럼 아이는 자유로웠을 텐데...’    

제대로 살아온 건지, 그 일이 왜 자신에게만 생겼는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할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여러 이유로 엄마는 그만 주저앉아 버린다. 과민해지고 우울감이 심해진다. 결국 조이는 잭과 떨어져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들 잭의 모습이 의외다. 바깥세상에 차근차근 적응해 간다. 어려워하지만 한발 한발 계속 앞으로 걷는다.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일상을 만들어간다. 아이의 생명력, 아이의 적응력이 대단하다. 엄마는 모든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했지만 모든 국면을 돌파하는 건 아이다. 탈출도 적응도 모두 잭의 손으로 이뤄진다. 엄마와 아이는 일방적으로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사이다.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지만 아이를 믿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제 생명력으로 걸어 나갈 것을 기대해야 우리 역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이와 잭은 자신들이 감금되었던 창고를 다시 가본다. 엄마는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문에 서서 그만 가자고 재촉한다. 하지만 잭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곳을 둘러보며 작별을 한다. 우리는 유년 시절과 그렇게 이별한다. 뒷걸음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어린 시절을 떠난다. 정작 그곳에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은 엄마다. 조이는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던 아이보다도 어쩌면 그곳에 더 오래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이가 제 생명력으로 자신을 지키고 성장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내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 많은 문제가 아이가 아닌 나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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