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play Dec 01. 2023

[텀블벅] 표지는 개미지옥이다.

메일 그만 보내요. 김연주 씨

텀블벅 프로젝트를 올리려면 표지가 필요했다. 표지가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프로젝트의 얼굴이라 중요했다. 머리는, 똥손 눈치는 보지도 않고 아이디어를 뽑아냈다.

오, 방금 재밌는 생각났어! 금방 하겠어!

방금 생각하고, 금방 해낸다는 결심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을까.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하나에 빠지거나 집착하는 편은 아닌데,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그렇게 표지에 꽂히고 말았다. 생각이 많으니 아이디어는 샘솟는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만 완벽하게 구현되는 게 단점이다. 더구나 이번엔 그림이다. 디자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구상 단계와 스케치에서 모두의 관심을 끌고 색칠에서 망해버리는 타입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방차와 소방대원을 꽤 시원시원하게 그려놓고 배경을 보라색으로 칠했다. 너무 강력한 배경에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았다. 선생님의 의아하던 표정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보라색 위에 빨간 색연필로 B라고 적어줬다. 그것도 잘 안보였다.


좋게 말하면 나만의 색감이 있는 편,

달리 말하면 색 감이 없는 편.


있다가도 없는 색, 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표지를 그려도 될까 싶었지만, 사실 이 생각은 이미 시작한 뒤에 들었다. s펜을 끄적이며 며칠이나 새벽을 보낸 후에.

그럼에도 꼭 하고 싶었는지 결국 나를 응원하는 중이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표지 그리기 소감은,

'내 손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나는 왜 선을 못 그리지?'

                 '수전증이 있었나?'

        '디자인은 노가다'


수정을 거듭하면서 그림을 재배치할 때마다 가장 많이 중얼거린 말은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나는 기술 부족으로 전문가들보다 훨씬 많은 노가다를 체험했다. 눈물이 난다.

정말, 아는 것이 힘이다.


유튜브를 보고 알음알음 배워가며 시작한 작업 덕에 입체적인 하루가 시작됐다.

낮에는 육아를, 아이 낮잠 시간에는 잠깐 그림을 그리다 금세 들리는 울음소리에 뛰어다니며 스릴 넘치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이면 홀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을 맞이했다. 그래서인지 디자이너 김연주 씨가 수시로 보내온 메일들의 제목은 1127 밤, 1128 낮, 1129 새벽 이런 식이었다.


문득 일할 때 생각이 났다. 출판사에 있을 때 디자이너에게 피드백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는데 그들의 피로도가 엄청났겠다는 생각이 든다. 월급 받고 할 때도 넌더리 나던 편집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디자이너까지 겸해서. 누구든 상대방이 되어 봐야 안다. 가끔 남이 하는 일은 쉬워 보이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그러니까,

김연주 씨, 메일 그만 보내요. 수정 작작해요.


디자이너 김연주 씨와 일하며 좀 질렸다. '이야, 이런 게 독립출판이구나.' 1인 다역.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일은 글, 그림, 표지와 내지 레이아웃, 교정 교열 등 참 많다. 근데 모든 피드백은 단 1명이 받고 해결해야 한다. 독립이라는 게 이렇게 어렵다. 머리는 깔때기가 된 것 같다.

피드백: 여기로 모으면 된대, 얘가 다 할 거야.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
           서른여섯이요!
나: 잠깐! 나 서른여섯인데.
피드백: 어쩌라고, 바빠. 서른일곱이요, 서른여덟이요!

혼자 피드백을 주고받다가 러프하게 만들어진 시안을 남편에게 보여줬다. '러프하게'라고 썼지만 수준이 러프할 뿐, 들인 품으로 따지면 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남편의 감상평은 다음과 같다.

어, 이거 그거 아니야? 고추 같은데... 저건 가슴 같아.
그리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고? 큰일 날 사람이네.


아니, 안 한 건 아닌데 하... 단번에 그렇게 보인다고? 음란마귀 씐 거 아니야?

정말 그런가? 색깔도 살구색이라 아 쫌 그러네. 에이.


그날 밤, 잠이 안 와서 야무진 상상을 해 보았다.

(책이 나와서 표지를 소개하는 자리)
나: 마스크가 해제돼서 갇혀 있던 콧구멍들이 밖으로 나온 거예요. 다시 냄새 맡기 전에 워밍업 하는 겁니다.

그때 누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가슴과 고추 같습니다!
(웅성웅성웅성웅성)

나: 원래 신체는 조금씩 닮기도 했고, 그중에 코는 더더욱, 그런 말도 있잖아요. 코가 크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거랑 상관없어요!

아, 잠이 안 온다. 대체 뭘 그린 거야.

디자이너 김연주 씨, 빨리 메일 좀 보내줘요.
수정 좀 해 줘요. 현기증 나.

다시 개미지옥으로 풍덩이다.

--------------------------------------------------------------------------------------------------------------------------


지금도 진행 중인데 저때보단 많이 발전했어요. ㅋㅋ 과정을 지켜봐 주시고 피드백도 주세요. 객관적인 눈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어요. 진짜 큰일 날 뻔.


매거진의 이전글 [텀블벅]을 질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