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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Oct 29. 2020

나만의 편지 쓰는 방법

김퍼피만의 노하우 대방출

ㅏ만



-김프로.


점심을 먹고 노곤하게 몸이 퍼지는 낮 2시 30분경, 같이 사는 나리언니가 카톡으로 날 불렀다. 김프로는 나리언니가 날 부르는 애칭이다. 난 언니의 부름을 듣고 카톡을 켰다. 곧이어 나리 언니의 하얀 말풍선 하나가 톡 생겼다.

-편지쓰기 원데이 클래스 열어주세요.

-아니 갑자기 왜요?

-편지 쓰고 싶은데 XX 구려서 못 해먹겠어요.

-ㅋㅋㅋㅋㅋㅋ

-열어달라고~

-알았어, 오늘 저녁에 거실로 모여!

당차게 알겠다고는 했는데. 어라, 난 단 한 번도 편지 쓰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클래스를 연다고? 수학도 영어도 디자인 스킬도 아닌 편지 쓰는 방법을?


나는 온라인으로 사람들에게 글을 받고, 그 글에 손편지 답장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일로 돈을 벌고 있다. 나리 언니 입장에서는 '편지 쓰는 일'이 직업인 내가 당연히 편지 쓰는 방법 하나쯤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나리 언니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나는 방법을 사용해 편지를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곧 다가오는 저녁에 편지 쓰는 방법을 어떻게든 만들어내 수강생을 가르쳐야 한다. 아직 수업이 시작하기 전이다. 이 글에다가 내 편지 작성 패턴을 분석해 '편지 쓰는 방법'을 만들어보려 한다. 이 글은 수강생에게 수업자료가 될 것이다.





나는 편지를 쓰기 전에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 사실 이건 상대방이 아는 사람이냐 모르는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데 아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은 상대방을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먼저 연필을 들거나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경험, 그 사람이 했던 말, 그 사람이 내게 했던 행동을 천천히 그려본다. 머릿속을 온통 상대방으로 동기화시키면 마음속으로 상대방에게 말을 건다. 어, 너 그때 그랬지? 나 그때 너 때문에 이랬는데 기억해? 아 이거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인데 깜빡하고 못했다. 우리 그랬던 거 디따 재밌지 않았냐. 아, 그리고 너가 저번에 나한테 그거 줘서 고마웠어. 이 일방적인 대화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뉘게 된다.

1번. 할 말이 폭발적으로 많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경우
2번. 막상 생각해보니 특별한 일이 없고 할 말도 너무 평범한 것 같아 그냥 쓰지 말까..? 생각되는 경우





1번일 경우 : 우선 침착한다. 그리고 종이나 노트북 빈 바탕에 연결성 생각하지 말고 일단 막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적어 내려간다. 또다시 침착한다. 침착한 태세로 두서없는 글을 읽으며 감정이나 상황이 비슷한 글끼리 그룹 지어 그 그룹의 주제를 요약해본다. 처음에 12가지였던 할 말이 3그룹 혹은 4그룹 정도 그룹핑이 될 거다.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3개나 4개로 압축된 셈이다. 편지에 12가지의 할 말을 와르르 쏟아 붓는 것보다 3, 4그룹으로 응축된 핵심 주제를 전달하는 게 훨씬 더 편지를 읽는 상대를 덜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다. 그룹핑이 완료됐다면 본격적으로 편지를 쓰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주제만 딸랑 전달하는 게 아니라, 주제를 먼저 쓰고 그 주제에 그룹핑 되어진 할 말들을 차례대로 나열하는 거다. 예를 들어 이렇다.

"나에게 있어 너는 착한 친구야. (주제1)

예전에 내가 필통을 놓고 왔을 때 너가 나한테 필기도구 빌려줬었잖아. (1-1)

또 언제였더라, 내가 500원이 모자라 핫도그를 못 사먹고 있었을때 넌 흔쾌히 1,000원짜리 지폐를 내게 내밀곤 '잔돈은 너 가져' 라고 했었는데 기억하니? (1-2)

그날 너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남은 잔돈을 gs편의점 유니세프 모금통에 넣었어. 너의 착함은 전염성이 있나봐. (1-3)"

거꾸로 그룹핑 되어진 말들을 먼저 나열하고 나중에 핵심 주제를 적는 것 또한 아주 좋은 방법이다. 주제를 먼저 적고 마지막에 다시 적는 수미상관 구조도 가능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제별로 수미상관을 쓰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이렇게 핵심 주제별로 적어나가면 된다. 간혹 핵심 주제 사이사이에 연결시켜주는 문장을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고민할 수도 있을거다. 하지만 넣어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편지글에 리듬이 생긴다. 1번일 경우, 수많은 말 속에서 연관되는 것끼리 그룹핑하고 그 그룹에 핵심 주제를 뽑아내는 것. 이게 별표 다섯 개다.






2번일 경우 : 1번은 이성을 필요로 하는 방법이었다면 2번은 본인의 문학적 감수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평범한 사건, 단순한 생각을 깊이 파고 들어가 구체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이때는 오히려 1, 2가지 에피소드만 다루는 게 좋다. 우선, 한 가지 에피소드를 최대한 작은 프레임으로 잘라 '상대방이 했던 행동 또는 말'을 자잘자잘하게 미사여구를 넣어 서술한다. 그 자잘자잘한 서술들 끝엔 꼭 '그래서 내가 상대방에게 느낀 감정'을 넣어준다. 감정은 최대한 부풀리는 게 좋다.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큰 단어로 골라 쓰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예시를 드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예전에 내가 필통을 놓고 왔을 때 기억나? 가을이었고, 너 그때 내 짝꿍이었잖아. 너는 기억 못 할지 몰라도 나는 똑똑히 기억해. 그날, 마치 구원자 같았던 너를 잊을 수 없거든. 수업이 시작되고 내가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려는데 집에 놓고 온 걸 그제야 안 거야. 너는 원래 수업이 시작하면 오로지 선생님만 바라보는 집중력 높은 학생이지. (그래서 내가 널 평소에 대단하고 멋진 아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근데 옆에서 내가 뚝딱거리며 당황해하고 있으니까 너는 나를 쓱 바라보았어. 그 눈빛은 '왜 그래?'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 같았어. 네 눈빛은 그날의 날씨처럼 정말 따스했지. 나는 너에게 필통을 놓고 온 사실을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어. 너는 그걸 용케 알아듣고는 너의 물고기 모양 필통에서 연필, 삼색 볼펜, 분홍 형광펜 하나를 꺼내 내 옆으로 쓱 밀어주었잖아. 나 그때 너에게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 했다구. 내가 필기할 때 이런저런 종류의 펜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는 내게 그렇게 다양한 필기도구를 빌려준 거였잖아? 너는 파랑새를 애정을 듬뿍 담아 키우는 사육사처럼 다정하기도 하고 작은 물건을 고치는 장인처럼 섬세하기도 해. 그런 너의 친절은 내게 엄청난 크기로 다가와서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어. "

이렇게 하나의 에피소드로 a5사이즈 편지지 한 장을 가득 채울 수 있다. 그 한 장 안에 상대방이 했던 행동, 상대방에 관한 나의 감정을 가득가득 담을 수 있는 거다. 사실, 덜 감성적이고 세세하게 상황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성 뚝뚝 떨어지는 편지를 쓰기 힘들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한 가지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쓰되 서술의 초점을 상대방의 행동, 말에 맞추면 어느 정도 편지를 수월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2번인 경우의 편지는 잘만 쓴다면 1번인 경우의 편지보다 훨씬 더 상대방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디테일이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처럼.





중세 유럽에서는 편지 쓰는 법을 책으로 가르쳤다. 인사말→근황→편지를 쓰는 진짜 이유→끝맺음 순서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편지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인터넷에 편지 쓰는 법을 검색해도 가지각색의 방법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 역시 이렇게 나만의 편지 쓰기 방법을 이야기했지만, 이건 그저 내가 본능적으로 쓴 편지글에서 '방법'을 꾸역꾸역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편지 쓰는 방법이란 정해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예 없다고도 본다. 다만, 편지글은 상대방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이므로 상대방에게 모든 초점 맞춰 글을 써야 하고, 난 이 글을 쓰는 동안 당신만 생각했다는 느낌은 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편지를 다 쓰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 상대방 생각만 아른거린다면, 그 희미한 잔상으로 인해 상대방을 뚜렷하게 보고 싶어진다면 그게 바로 잘 쓴 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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