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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Mar 25. 2021

방하착(放下着)

4박 5일간의 순천 선암사 템플스테이 후기

방 앞마루에 앉아 글을 쓰고있는 나의 모습..!


아직 순천 선암사 템플스테이 체험이 하루가 남았지만, 그래도 체험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걸 말하라면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수시로 추켜올리며 사찰을 거닐었던 일이다. 템플스테이 담당 스님, 등명 스님이 내 신체 사이즈보다 훨씬 더 큰 절복을 주셔서 벌어진 일이다. 스님께 바지 사이즈가 크다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허술한 파란색 벨트뿐이었다. 벨트를 매면 화장실 갈 때 걸리적거릴 게 뻔하니 매지 않았다. 바지는 언제나 내 치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바지를 부여잡고 주로 신검당과 적묵당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니까 숙소와 식당만 오갔다는 소리다. 개인적인 이유로 예불을 드리지 않아 다른 법당에는 들어갈 일이 없기도 했고, 여행지 한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빨빨거리며 구경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고, 궁극적으로 선암사에 온 이유가 산속에서 고요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함이었기에 여행객의 호기심 어린 태도를 버린 것도 있다.


이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선에서 가끔 옆길로 새기도 했다. 그건 바로 사찰 입구에 있는 매점에 가기 위해서. 매점에는 달콤한 속세의 맛이 있다. 아이스크림이다. 첫째 날에는 절에 온 이상 속세와 가까이하면 안된다는 괜한 기합이 들어가 매점을 멀리했지만 둘째 날부터 거리낌 없이 아이스크림에 손을 댔다. 둘째 날엔 메로나를 셋째 날엔 빵빠레를 오늘은 부라보콘을 먹었다. 마지막 날인 내일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을 거다. 서울에 가서 치킨을 먹을 거기 때문이다. 평소 채식을 지향해서 치킨을 자주 먹지 않지만, 이곳에 와서 삼시 세끼 건강한 나물 반찬을 먹다 보니 되려 건강과는 거리가 먼 기름기 가득한 치킨이 너무도 먹고 싶어 졌다. 특히 알싸~한 마늘 치킨.






위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독서와 글쓰기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템플스테이에 왔다. 그래서 책 네 권과 노트북을 함께 챙겨왔다. 오직 바람 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산속에서 하는 독서는 얼마나 집중이 잘될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녹음이 우거진 풍경 아래에서 하는 글쓰기는 또 얼마나 멋진 창작물을 만들어낼까. 무려 한 달 전부터 이런 장구한 기대를 해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에서 하는 독서와 글쓰기는 속세에서 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책을 읽다가 막히는 구간이 왔을 때 마법처럼 읽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글감 또한 쉽사리 생각나지 않았다. 자연이 나의 능력을 변화시킬거라고 예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자연은 무엇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나를 변화시키는 건 나 자신이다. 이곳에 와서 윤활유처럼 매끄러운 독서와 글쓰기를 원했다면 내가 그만큼 더 노력을 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어리둥절한 자연에게 모든 걸 의지하려고 한 내가 조금은 창피스럽다.


지금은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절에 와서 이토록 몰입이 잘된 순간은 지금이 처음인 것 같다. 불교에서 '마음을 내려놓아라'라는 의미인 방하착(放下着)을 잘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조금 전에는 함께 온 친구가 나에게 지루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지루하지만 지루함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고 나서 혼자서 헉하고 놀랐다. 진짜 방하의 경지에 든 것 같아서. 방하의 경지에 이르면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데, 나는 지금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게 아닐까.


아까 전, 신검당 뒷마루에 앉아 작고 낮은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리고 이 글의 도입을 쓰던 중이었다. 그때 등명 스님이 지나가며 한마디 하셨다. "뭘 열심히 해쌌네?" 여태 등명 스님 앞에서 책도 몇 번 읽었고 글도 수차례 썼었는데, 이제야 내가 진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보다. 인정한다. 이전까지의 나는 외부환경이 나의 능력치를 올려줄 거라는 기대에 얽매여 열심히 하는 '척' 했던 거니까. 스님은 정확히 보고 정확히 말했다.






이곳을 떠나는 내일까지 방하의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싶다. 그러면 그사이에 이와 비슷한 분량의 글을 한 편이라도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 욕구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 이 글을 완성했으니 다 되었다. 4박 5일 템플스테이에 와서 고작이 아닌 무려 글 한 편을 완성했으니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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