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지문들 #8 혼자 놀기

by 김표고

<김추추의 이야기>


혼자 놀기: 신년 사주만큼이나 유익한 시간

연말이 되면 내년 운세가 그렇게나 궁금하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에게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철학원이나 사주카페 같은 곳에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흐릿한 연무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쪽을 택하는 게 청춘답다 믿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너 내년에도 그냥 그래’ 같은 소리를 들을까 무서운 걸 테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인데, 여행 기자라는 경력에 비추어 볼 때, 사주만큼 나를 알 수 있는 시간은 건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때는 몇 년 전, 지긋지긋하던 회사를 퇴사하면서 퇴직금으로 한탕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정말로 나를 들들 볶던 회사였기 때문에 새 출발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하루도 다니기 싫은 곳을 오직 월급 하나 바라보고 몇 년이나 참아낸 스스로의 성실함과 인내심에 대한 보상심리가 컸다.
그리하여 눈발 내리는 춘삼월에 유럽으로 떠났다. 기간은 한 달. 목적지를 유럽으로 잡은 이유는 이 소중한 한 달을 보낼 최고의 국가를 하나만 정하는 게 불가능해서.
나는 비행기 인아웃만 정한 채 그때그때 여건에 맞게 떠돌아다녔다. 돌아와 제일 많이 남은 건 그곳의 풍경이나 모네의 그림이 아니라 이제껏 잘 몰랐던 ‘나’다. 그 전까지 나는 내가 대단히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한 많은 클럽을 누비며 밤낮없이 흥청망청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에 입구에 붙어있던 ‘Jazz Night Party’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3월의 낮은 짧았다. 낮이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다가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저녁 7시 전에 숙소로 들어가 일기를 썼다. 몸이 녹으면 잠이 쏟아졌다. 나는 유럽까지 가서 서울에서보다 더 일찍 잤다.
그렇게 알게 된 나의 가치관: 여행에서 모험보다 중요한 건 건강, 경험보다 중요한 건 안전.

스스로 대단한 모험가인 줄 알고 여행 기자가 된 건데, 자신이 얼마나 낯설던지. 그리하여 내 유럽여행은 묵언과 1일 1식의 수행기록으로 남았다. 그렇게 지내보니 순전히 자의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실은 휩쓸려 행한 것이었다는 알게 됐다. 내 고민의 상당수는 ‘저 사람이 기분 나쁘진 않을까’, ‘이 사람이 내 의견을 마음에 들어할까’ 등에 매몰돼 있었다는 것도.
여행 막바지, 고독한 시간을 정리하며 혼자여서 좋은 점을 적어보았다. 혼자 여행에선 타협도 배려도 필요 없다. 기차를 놓치면 그 도시를 안 가면 되고 돈이 아까우면 밥을 안 먹으면 된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에도 자책이 없다. 자신을 포함한 누굴 탓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과 시선이 없을 때에는 그런 것이 매우 쉽다. 나아가 포기 앞에서도 크게 힘들지 않다. 내가 허락한 포기인데 뭐가 문제인가?
길도 잃고 지도도 없던 나는 족저근막염이 도질 정도로 하루에 이유없이 5만보 정도를 걸었다. 왜 휴대폰을 놓고 왔을까 자책할 시간에 그냥 걸었던 것 같다.

사주가 궁금해지는 요즘, 그때를 떠올리며 걸어봐야겠다.



글 : 김추추(writer0511@gmail.com)




<김표고의 이야기>







* bgm : 루시드폴의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








글, 그림 : 김표고 <인스타그램 @kimpyogo / 메일 : kimpyogo@naver.com>





<프로젝트 소개>

자주 떠오르는, 매주 한 단어
일상의 지문들
김표고 X 김추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 대답이 될 만한 단어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참 평범한 것 같은 일상인데 이 단어를 적다 보니 각자의 일상은 꼭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었습니다. 떠올려보세요. 당신에게도 소중할, 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기타 등등의 연애' 저자이자 매일 3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징그럽게 성실한) 김표고와, 매거진 에디터로 12년을 일하다가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글을 쓰(고 혼자 읽)는 김추추가 함께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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