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지문들 #9 크리스마스

by 김표고

<김추추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반드시 선물은 있다.

비엔나로 취재 갔을 때의 일이다. 4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뽑아야 하는 출장이라 부담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박물관 관장으로부터 비엔나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거리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 상황도 찾아왔다. 영어실력 및 자신감이 매우 부족하다 못해 처참한 수준이었던 나는 취재를 매끄럽게 진행하지 못했다. 반면 같이 간 포토그래퍼 선배는 영어를 매우 잘했다. 선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내가 해야 할 일까지 본인이 하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그저 바라만 보았는데, 그 눈빛이 나를 혐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순도 백프로의 자괴감이었다.
예술의 도시답게 비엔나는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온 도시가 말도 못 하게 화려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만 슬펐다. 영어를 못하는 동양인이면서 취재를 진행해야 하는 여행기자면서 동시에 매일 밤 출장 경비를 산출하고 내일의 스케줄을 짜야 하는 직장인이었다. 힘든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자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호텔로 돌아가는 길 내내, 진눈개비 내리는 비엔나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올해는 산타 선물이 없구나. 그래, 선물 받을 일도 하지 않았잖아. 툭하면 우는 어른 따위에게 할당량이 있을라구.
그 출장의 마지막 일정은 비엔나 시청 주변의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역시 말도 안 되게 예쁜 건물 앞에 동화 속 같은 거리 상점들이 즐비했다. 나는 이끌리듯 글루바인 텐트로 들어갔다.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핸드메이드 머그잔에 담아 파는 곳이다. 와인을 다 마신 후에 잔은 기념품으로 가져가도 된다. 글루바인을 한 잔 사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스노우 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작은 기적이 반드시 일어날 것 같은 느낌. 나는 한 잔을 더 사서 어렵게 선배에게 다가갔다. 매우 많이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해 며칠간 말을 걸지 못했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다음엔 영어공부 많이 해서 올게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자 마음이 뜨끈하게 차올랐다. 선배는 ‘괜찮다’고 했다. ‘영어는 공부하면 돼. 하지만 공부하지 않아도 이미 잘하는 게 너에게 많거든. 잊지 말라고.’라고도 해주었다. 그것이 내가 받은 그 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나는 두 개의 글루바인 잔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컵을 꺼내서 사용한다. 10년의 출장 동안 가장 못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작은 용기를 낸 것, 그리고 그때에 비해 많이 성장한 것,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얼마간은 걸어온 것을 이 컵을 보며 종종 느낀다.
당신이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무엇인가? 잘 찾으면 작은 것 하나라도, 분명 나올 것이다.

글 : 김추추(writer0511@gmail.com)




<김표고의 이야기>

















글, 그림 : 김표고(인스타그램 : @kimpyogo / 메일 : kimpyogo@naver.com)





<프로젝트 소개>

자주 떠오르는, 매주 한 단어
일상의 지문들
김표고 X 김추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 대답이 될 만한 단어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참 평범한 것 같은 일상인데 이 단어를 적다 보니 각자의 일상은 꼭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었습니다. 떠올려보세요. 당신에게도 소중할, 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기타 등등의 연애' 저자이자 매일 3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징그럽게 성실한) 김표고와, 매거진 에디터로 12년을 일하다가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글을 쓰(고 혼자 읽)는 김추추가 함께 만듭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일상의 지문들 #8 혼자 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