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 또박또박
나는 종이 위에 펜으로, 연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세상이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고, 이 추세대로라면 타자를 치지 않고 생각만으로도 글이 입력되는 세상이 당장 내일 닥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나는 글자들을 손으로 써 내려가는 이 감각들이 너무 좋다. 열심히 쓰다가 손목이 뻐근해지면 한 숨을 돌리는 것도, 아무도 식별하지 못하는 나만의 글자들을 눈으로 훑는 것도, 종이에 쓴 글들을 한 글자 한 글자 타자로 옮기며 촌스러운 단어들을 좀 더 세련된 단어들로 맞바꾸는 작업도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렇게 완성된 글을 다시 종이에 프린트해서 퇴고하는 시간들도 나는 너무 좋다.
이런 글쓰기 습관은 학창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그야 당연히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서 글을 쓰고자 하면, 교과서 아래 공책을 펼쳐두고 그곳에 휘갈기는 것 말고 결코 방법이 없다. 휘몰아치는 반항심을 오롯이 내 글들 속에 녹여냈고, 덕분에 나는 선생님들에게 좋은 평판 -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 한다는 오해를 얻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갈 열심히 쓰고 있었으니, 어느 누구에게도 수업 내용을 필기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실상은 주체할 수 없이 팽창하는 온 갖가지 상상력을 글자들 속에 묶어두려 애쓰던 모습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든 종류의 글들을 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종이 위에 풀어놓을 수만은 없어서, 컴퓨터에 곧바로 쓰는 글과 손으로 먼저 종이에 써내는 글을 분리해 쓰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마주하게 되었던 억만 장의 리포트들까지도 종이에 먼저 또박또박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모두 써낼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다. 어쨌든 리포트를 작성할 때에는 비교적 시간이 좀 덜 걸리는 방법을 채택해야 했고, 웹에서 검색한 자료들을 바로바로 옮겨오는 일도 필요했으며 엉망으로 구성된 글을 문단 채로 순서를 맞춰 나가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일감으로써의 글쓰기'는 컴퓨터에 곧바로, '쓰고 싶은 글로써의 글쓰기'는 종이에 먼저 쓰고 컴퓨터에 옮겨 적는 식으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두 가지로 분리해서 쓰는 작업을 할지는 모르겠다. 두 가지 방식 모두 각자 나름의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라 어느 것 하나는 대충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더 정성 들이는 것, 뭐 그런 간단한 구분은 분명 아니다. 그냥 글쓰기 종류에 따른 방식의 선호도 일 뿐이니까.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샤프펜슬의 움직임과 그 동작들의 연속에 내 손목과 팔목에 전해주는 압박감 같은 것들을, 그래도 나는 아마 오래도록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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