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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Sep 16. 201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영원한 회귀, 결국 사랑으로의 회귀.

P.9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고전문학을 고전문학 이도록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과연 그저 '옛날에 쓰인' 것만으로는 현대에까지 꾸준히 사랑받으며 읽히지 못했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고전문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현대에는 누구나 책을 쓸 수 있기에 매일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책이 되고, 어떤 것은 나왔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하물며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이미 쓰이고 사라져 간 책들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 가는 이야기들 중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들은, 살아남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살아남았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언컨대 전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를 아울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야기의 주제, 바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마시의 사랑, 테레자의 사랑, 사비나의 사랑 그리고 프란츠의 사랑. 이들 외의 다른 인물들 역시 자기만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같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도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소통에 오해가 생기고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는 사실 현대에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P. 63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결국 이 책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의 지난 사랑들과 현재의 사랑을 곱씹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네 사람(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모두의 사랑에 공감했지만 누구의 사랑도 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테레자를 만나기 전까지 토마시에게는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P. 28)이었으며 이 둘은 완전 별개의 욕망이었다. 테레자를 만나며 그 경계가 허물어졌다가 다시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다가 결국에는 테레자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게 된다.

테레자는 우연의 힘을 믿었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라고 믿는 테레자에게, 잊히지 않는 단 하나의 사랑이 된 토마시는 '여러 우연이 합해져'(P. 88) 나타났고 그래서 토마시를 사랑함에 있어 동반된 모튼 고통을 감내한다. 토마시의 '바람'을 알고도 모르는 체 하거나,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노력을 하며 결국 토마시가 온전히 테레자에게 돌아오는 것을 기꺼워한다.

사비나와 프란츠는 토마시와 테레자에 비하면 조금 더 자유분방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어휘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결국 그로 인해 끝이 났다.


P. 337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은 비슷하다. 두 사람이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긍정적인 오해가 생기고, 그로 인해 감적이 더 견고해진다. 두 사람의 오해가 비슷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를 두고 '이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은 누구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자기만의 언어로 타인을 잘 '오해'하는 것이다. 잘 된 오해는 이해가 된다.

그리고 잘 된 이해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은유'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P. 384 그는 플라톤의 <향연>의 유명한 신화를 떠올렸다. 옛날에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녔고, 신이 이를 반쪽으로 분리해서 그때부터 서로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사랑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짝'을 찾는 것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이 반드시 남녀 간의 성적 결합만을 야기하는 사랑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한 회귀. 결국은 '사랑'을 향한 회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고전문학도 ‘페미니즘 관점에서 읽기’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P.506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장장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두 달 여 간의 시간 동안 공들여 읽었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데는, 내 게으름도 그 이유겠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며 생각할 이야기들이 많았던 탓도 있었다. 고전을 고전 이도록 만들어주는 이유는 역시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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