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단 둘이 다녀온 세부 여행에서
음력 8월 15일. 엄마의 생일이다.
엄마의 모든 생애를 두고 보았을 때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생일엔 엄마를 위한 변변한 축하는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엄마는 남의 집 제삿밥을 차리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며 보내곤 했다. 음력 8월 15일, 매년 민족 대 명절인 추석 당일이 생일인 엄마는, 모르긴 몰라도 생일이 오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내가 철이 들었을 무렵에는 엄마의 명절 우울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엄마의 생일을 챙겨드리고자 애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불편한 사람들 - 아버지 쪽 형제자매들과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냥 즐겁지는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케이크도 부담스럽다"시며 사양하기 일쑤였다.
나는 나이가 더 들었고 친척들의 의미 없는 말들에 상처받는 명절을 맞이하는 것보다 홀로 시간을 보내기를 택하기 시작했다. 돈을 벌면서부터는 명절 동안 한국 밖을 배회하기도 했다.
엄마와의 여행을 결심한 것은 이 두 가지 마음이 보기 좋게 섞여서였다. 엄마에게 생일 선물을 해 주고 싶었기도 하고, 명절 친인척 모임도 피하고 싶었다. 엄마의 생일 선물로 해외여행을 해준다면, 이 보다 더 좋은 핑계는 없을 거 같았다. 추석 연휴에 엄마와 단 둘이 해외여행. 그것이 최초의 기획이었다.
몇 가지 어려움은 있었다. 추석 연휴에 인기 있는 여행지는 이미 모두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남은 것은 터무니없이 비싼 요금의 패키지여행뿐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본인의 생일 당일에 축하를 받는 것보다 명절 연휴 내내 친인척들에게 시달리는 쪽을 선택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는 마음의 짐을 더는 것이 더 편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적절한 타협점으로, 추석 연휴가 끝나는 시점인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3박 5일 일정으로 세부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2016년! 무려 지금부터 햇수로 2년 전이다!)
엄마를 위한 생일 선물인 여행이긴 했지만, 나는 나대로의 계획으로 1년간 학원 강사 일을 열심히 했던 나 자신의 수고를 치하하는 의미도 있었으며, 또한 이 여행을 빌미로 추석 연휴 친인척 모임에 빠지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다. 그런 부수적인 이득을 쫓았으니, 약간의 죄책감을 덜 목적으로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물론 엄마의 생일 선물이기도 하니, 엄마에게 비용의 부담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비용을 다 부담하면서 혼자 일정도 다 짜고 숙소도 찾고 비행기도 수배하고, 이런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패키지여행으로 예약을 하게 되었다. 엄마 역시 변수가 많은 자유여행보다는 정해진 일정에 맞춰 움직이고, 변수가 생기더라도 여행자인 우리가 고달파지지 않는 패키지를 선호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필리핀 세부로 모녀끼리 패키지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깨달은 것이 많았다. 첫째로는, 앞으로 다시는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가지 말아야겠다는 것과 둘째로는 엄마도 나만큼이나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뭐 엄마의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냐만은.
감정 표현을 숨 쉴 틈 없이 하는 엄마는, 내가 평생 살며 봐왔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거의 서른 해 가까이 살며 내가 알고 지냈던 엄마는, 짜증이 나는 일이 있어도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그쳤고, 기쁜 일이 있어도 은은한 미소만 짓는 사람이었다. 감정 표현이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느 정도냐면, 이것도 내가 다 자라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지금 엄마는 한쪽 귀가 전혀 안 들리신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엄마에게 중이염이 왔고 이를 그냥 방치하다가 한쪽 귀가 그렇게 영영 멀게 되셨던 것이었다. 아파도 아픈 내색 한 번 없으셨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참다 병을 키우셨던 것이다.
가족끼리 모여 앉아 개그 프로그램을 보아도 엄마는 큰 소리 내며 웃는 법이 없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 화가 나셔도 크게 화를 내신 적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와 남동생이 싸우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불같이 화내긴 하셨지만.
그렇게 감정 표현을 절제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나와 단 둘이 세부 여행을 하며 3박 5일 내내 붙어 있는 동안 온갖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니,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비싼 돈 들여 모든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엄마랑 좋은 시간 보내려 왔는데, 왜 엄마는 내게 짜증을 내서 나만 스트레스를 받는가, 하고 회의감에 빠지게 될 정도였다. 엄마는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인 여행을 내내 내게 토로하셨고 나는 나대로 속상해졌다.
대체 왜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짜증을 내실까. 그리고 이렇게 짜증을 잘 내시는 사람이 그동안은 짜증 날 때 표현을 못해 어떻게 참고 살았나. 대체 무엇이 엄마로 하여금 감정의 바닥을 드러내서 내게 보여주게끔 만들었을까.
질문을 곱씹었더니 나왔던 답은 하나였다. 아빠.
아빠와 함께 있는 엄마는, 그 어떤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짜증이 나더라도 짜증 난단 말 한마디 못 하고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기쁜 일이 있어도 큰 소리로 좋단 이야길 한 적 없으셨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 옆에서 자신의 감정을 속으로 삭히고 숨기고 감추고 절제하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아빠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던 게 기억이 났다. 엄마도 원래는 애교도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아빠가 너무 무뚝뚝하고 뭘 물어봐도 대답 한 번 제대로 해 준 적 없고, 그러니까 자신도 지쳐서 더 이상 아빠 앞에서는 아무 표현을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온 가족이 모이면 다들 아빠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아빠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해 보이면 아빠의 주의를 돌리려 애썼고, 아빠가 재미있어 하면 우리는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물론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바로 그 부분, '가족을 위해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가족 역시 아빠를 위해 감정을 숨기고 감추며 희생하고 있었다. 특히 엄마가.
아빠 옆이 아닌 곳에 있는 엄마는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소리 내 웃기도 하고, 짜증 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나에게 가감 없이 그 감정들을 드러냈다.
엄마가 여행 내내 짜증만 내셨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어떤 것은 즐거웠고 재미있어하셨으며, 그래서 이건 이래서 재미나, 이렇게 재미있는 거 한 번 더 하면 좋겠어, 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시기도 했다. 그냥 엄마가 보여준 감정 표현의 대부분이 짜증이었을 뿐이지.
엄마도 이렇게나 감정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꾹꾹 눌러 놓고 살고 계셨구나.
엄마랑 단 둘이 다녀온 세부 여행에서, 나는 엄마의 그런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 아마 거의 서른 평생 내가 봐왔던 엄마의 웃는 얼굴보다 3박 5일 동안 봤던 엄마의 웃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짜증의 표현은 두 말할 것도 없었고.
나는 나대로 엄마를 배려하고 생각해주고 엄마에게 잘 해주고 있었다고 착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여행으로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효도 이상을 해드렸다고도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데 글쎄, 어땠을까. 엄마를 '위한' 여행이라고는 했지만 정말 내가 엄마만을 위해서 여행을 기획했던 것도 아니었고, 여행 내내 내게 짜증 내는 엄마에게 나도 짜증이 나서 버럭버럭 화를 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도 했다. '이건 엄마 생일 선물이야. 이건 내가 엄마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니까 참아야지. 나는 짜증을 내지 말아야지.'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글쎄, 지금도 나는 엄마랑 단 둘이 여행을 절대 가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랑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나를 낳고 키우시느라, 고된 시집살이에 본인 생일에도 허리 굽혀 일하시느라, 그냥 힘들게 사셨던 날들을 보상해드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아니다. 아직도 엄마는 엄마고, 여전히 엄마는 나에게 감정 표현을 덜 해서 나를 안 힘들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세부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 속에서는 엄마와 나는 웃고 있다. 웃는 눈매가 매우 닮아있고, 웃을 때 입꼬리가 비슷하게 올라간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엄마 딸인데.
엄마랑 보냈던 시간은 아마 나에게 잊지 못할 오랜 교훈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어쩌면 또 나중에 엄마랑 단 둘이 여행을 가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주 1회 연재 목표입니다.
*얼굴이 드러나는 사진을 브런치에 쓸 생각은 없었는데, 여행지에서의 사진을 공유하려니 쓰게 되었네요. 부끄럽지만 앞으로도 잘 읽어주세요 :)
Copyright. 2018. 윤해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