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한창 유행이 휩쓸고, 또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상영작으로 올라와 토론토도 살짝 스치고 지나갔던 영화가, 언제쯤 토론토 일반 상영관에서도 볼 수 있을까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던 영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볼 기회가 드디어 당도했다. 지난 주에 상영관에 스케쥴이 올라온 것을 보고 부랴부랴 예매를 하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유일한 상영관까지 갔다. 그리고 과연 박찬욱이구나, 하는 감탄을 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마침내.
캐나다에서 한국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기회란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박찬욱 정도 되는 거장(!)의 영화가 토론토에서 상영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야? 그것도 이렇게 상영기간이 촉박하다니.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으면 곤란하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줄거리는 간략하다. 형새 해준이 사망자의 아내이자 피의자 서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의 범죄를 덮어주고 떠나지만, 서래가 또다른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해줄을 다시 만나게 된다.
덮어놓고 '불륜 미화'라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륜의 미화보다는 불륜과 인과응보로 보였다. 해준과 서래의 관계를 눈치 챈 해준의 아내, 정안은 해준을 떠나고, 서래는 해준과 헤어지기 위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영원히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어버린다. 결코 행복한 결말을 그리지 않고 있는 이 영화가 어떻게 '불륜 미화'로 단순히 정리될 수 있을까.
몇 년 전이었다면 아마 이 영화를 보는 데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게 영원한 미래를 약속한 이가 없었더라면, 혹은 아주 연약한 약속만이 있는 사이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피앙세와 손을 맞잡고 앉아서, 해준이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꽉 힘을 주었다. 피앙세의 손에는 불안감에 땀이 흘렀고, 나 역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불안해졌다.
영화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기를 멈춘 적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래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서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끊임없이 그를 생각하다 마침내 서래에게 저녁밥을 만들어준 해준은 처절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붕괴됐어요.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형사로서,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인생이 철저히 깨지고 무너져버렸다는 말이, 사랑 고백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사랑 고백이라 할 수 있을까.
그 폰은 깊은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
이 말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도 함께 버리세요, 아무도 못 찾게."라는 뜻으로 들렸다. 붕괴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의 사랑을 누구도 발견할 수 없도록 깊은 바다에 꼭꼭 숨겨두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서래도 해준에게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는 전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계획하에 남편을 살해하고,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표정을 짓는다. 오랜 시간 인내한 여자의 얼굴은 편안함이었다. 마침내 우는 서래의 모습에서 해준은 안도를 했지만, 서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는다.
영화의 포스터 사진 중 서래의 얼굴이 나온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퍽 기묘하다. 그 느낌이 명화, <모나리자>가 떠오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웃는 듯 웃지 않는, 우는 듯 울지 않는 여자.
해준을 다시 만나고 싶어한 서래가 선택한 방법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직접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어도 살인을 유도한 치밀함에서, 한때 떠돌았던 싸이코패스 테스트가 떠올랐다.
- 엄마의 장례식에서 난생 처음 만난 남자에게 사랑에 빠진 한 여자. 미처 연락처를 묻지 못하고 흐지부지 보내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자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자의 자매는 왜, 어쩌다 죽었을까?
- 싸이코패스의 답은, 여자가 남자를 보기 위해 자매를 죽였다.
서래의 행동도 이런 면에서 싸이코패스처럼 보였다.
끝끝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스스로 사라지기를 택한 것마저도.
'헤어질 결심 / 떠나갈 결심'
한국어로는 '헤어질 결심'이지만 영어로는 'Decision to leave', 즉 '떠나갈 결심'이다.
헤어진다는 것은 현상의 중지를 뜻하지만, 떠나간다는 것은 현상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제자리에 있는 채로 '만남'을 중단하는 것과, 적극적으로 만남의 상태에서 멀어지기를 결심하는 것은 꽤 다른 느낌이다.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서래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의 사랑을 깊은 곳에 숨겨두고서.
서래는 해준을 떠나갈 결심을 한다.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기 위해서 해준의 곁에서 영영 떠나간다.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서래를 잃은 해준보다는, 해준을 떠난 서래에게 이입을 하고 말았다. 사랑이 전부였던 한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끝내는 법은 늘 자신에게 잔혹한 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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