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처음 발을 내딛였던 때가 2019년 8월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론토는 온통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 광고로 도배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캐나다의 대표 작가가 신작을 냈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제목만 얼핏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캐나다에 사는데 캐나다 대표 작가의 작품 하나 정도는 읽어줘야 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빨간머리 앤도 읽어야하는데.) 그런 비슷한 희미한 동기가 먼저 떠올라서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을 동시에 결제했다. 읽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도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막연하게 시대적으로 <시녀 이야기>가 먼저 쓰였으니 이걸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증언들>을 읽어야겠다고 정해놨다. 그 두 작품 사이에 35년이라는 시간이, 작품 내에서는 15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는 줄은 몰랐다. 그 사이에 작가의 문체가 달라진 것인지, 두 작품을 연달아 읽으며 비슷하면서도 다른 속도감에 새삼 놀랐다.
<시녀 이야기>는 '길리어드'라는 새로운 가상의 국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고요와 잔잔한 바람을 보여준다. 길리어드는 기독교의 안 좋은 극단과 가부장제의 기묘한 조화를 국가화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자리가 명백히 구분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각각의 계급이 나뉜다. 남자들의 계급으로는 국가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사령관'과, 사람들의 불손한 움직임을 감시하는 '눈', 그리고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천사'와 사령관을 보좌하는 '수호자' 등으로 나뉜다. 여자들은 사령관의 공식적인 반려, '아내'와 사령관 집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그리고 사령관에게 한 명씩 배정되어 아이를 낳는 임무를 맡은 '시녀'의 계급으로 나뉘는데, 이 여성들의 교육을 맡은 것은 '아주머니'라는 계급의 여성들이다. 아주머니만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허용된 세계다. 그리고 이 계급 바깥에는 일반 국민, '이코노'가 존재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시녀 이야기>는 이 다양한 계급 중 '시녀'에 해당하는 사람이 써내려간 이야기다.
시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오직 사령관의 부속품, 도구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사령관의 것'이라는 의미로 '오브+사령관 이름'으로 불린다. 주인공이자 화자는 '오브프레드', 프레드의 시녀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 삶을 빼앗긴다는 것.
'오브프레드'의 이름은 <시녀 이야기>에선 명징하게 나오지 않는다. <증언들>을 읽고 난 후에야, 아 그게 오브프레드의 본명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
이름이 없는 삶,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는 삶을 상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내 존재가 지워지는 것 같다. 너무 오싹하고 공포스럽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어느 날 갑자기 은행 계좌가 모두 동결되고, 출근했던 직장에서 별안간 해고를 당해 집에 돌아와야만 했던 부분이 아니었을까. 순식간에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험. 그러나 세상은 어느 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분위기만 풍긴다. 그 분위기를 읽어냈을 땐 이미 도망치기에 늦은 때였다.
이름을 빼앗긴 여자들은 '라헬과 레아 센터'로 들어가 재사회화를 받는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녀로서,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P. 210. 우리는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첩이나, 게이샤나 창녀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를 그 범주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우리들에게서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했고, 은밀한 욕망이 꽃 필 여지도 전혀 없다. 특별한 총애 따위는 그쪽이나 우리 쪽에서 미리 알아서 정리할 테니 사랑이 싹틀 발판조차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로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으로서만 존재하는 계급. 그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면 '콜로니'로 쫓겨나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기에, 그것만은 피하고자 아등바등 하는 삶.
그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기를 멈추면 그대로 살아지는 삶이겠지만, 오브프레드는 생각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놀리테 테 바스타르데스 카르보룬도룸. 그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오브프레드는 되뇌인다. 이름을 빼앗겼어도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비록 소설에 불과하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군이 물러가고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초들을 떠올리면, 결코 이것이 소설 속에서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교육의 기회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삶과 주체성을 빼앗긴 여자들.
그렇지만, 그 빌어먹을 놈들에게 절대 짓밟히지 말라, 속으로 이를 갈며 절치부심하는 여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굴복하지 않으려는 여자들이 분명 있다.
<시녀 이야기>는 온통 회색빛의 암울한 세상을 그린다. 스펙타클하고 흥미진진한 사건이 터지지는 않는다. 오로지 고요하게 침잠하는 시녀의 일상들이 나열되다가, 소설 막바지에 다달았을 때야 조금 거칠어진 호흡으로 발버둥 치는 오브프레드의 모습이 등장한다. 마치 빛을 잃어가는 전구가 느린 속도로 깜빡거리다가 일순간 아주 밝은 빛을 터뜨리고는 김 새는 소리와 함께 픽, 꺼져버린 것 같다. 그렇게 암전.
'이렇게 소설이 끝나버린다고?'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도 소설이 일부분이라는 것은 금방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 덕분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완결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증언들>은 세 명의 증언이 번갈아, 혹은 뒤섞여 튀어 나온다. '증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부드러운 어투로 말하듯 이어진다. 그래서 <시녀 이야기>에 비해서 읽기 편했다.
<시녀 이야기>는 친절한 소설은 아니었다. 초반에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배경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며 읽었다. 그렇게 <시녀 이야기>를 읽은 덕분에 <증언들>은 이해가 쉽게 되었다. 하지만 <시녀 이야기>를 읽지 않았어도 <증언들>은 읽기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그만큼 친절하고 조금 더 설명적이다.
<증언들>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정체는 모두 이 시리즈의 재미를 판가름하는 요소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다. (물론 검색하면 금방 나오는 정보들이긴 하지만!)
책을 읽으며 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지난 달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 나와 용기있게 피해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의 모습.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던 투사들의 얼굴. 히잡을 벗고 거리로 쏟아지던 여자들, 그런 여성들을 지지하는 남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