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 있어요
벌써 2020년이 끝나갑니다.
누군가는 일을 하다가 업무 툴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코드가 뽑혀버린 기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올해 어떠셨나요? 수많은 계획이 멈추거나 취소되는 상황이 저처럼 두렵지는 않았나요?
저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고 싶어서 몸을 바삐 움직였답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당연하게도 이게 시작이겠지만)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수십 번 기차에 올랐고, 노트북을 들었다가, 카메라를 들었다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네요.
그와 별개로 올해는 유독 아픈 날이 많았습니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아팠던 건 아니고요.
자존심에 꺼내지 않고 있다가 상해버린 마음과 어렵게 뱉었다가 독이 되어버린 이야기,
원래 그렇고 그런 것들 사이에서 참 많이도 밤을 지새웠네요.
머리로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구하려 하는데 왜 마음은 그토록 다루기가어려울까요?
이번 달 초, 지은이가 귤을 보내주었습니다.
10kg 상자에 저를 응원하고 아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어요.
그 애정이 너무 고마워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한가득 귤을 쌓아놓고 먹었습니다.
그러다 해가 뜨기 직전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 이어지기 시작하고,
상자에 미처 손을 대지 못 한 채 눈으로만 인사하던 즈음 무른 귤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무른 귤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순식간입니다.
이어 바로 곁에 있는 귤에 곰팡이를 마음껏 옮기지요.
그날 퇴근후 귤 상자가 변할까 두려워 바로 무른 귤을 골라냈습니다.
아, 마음도 이렇게 챙겼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내 마음을 퍼렇게 멍들일 것들을 살펴보고 골라내면 됐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내내 방치해버렸던 거예요.
저는 마지막 남은 귤 한 바구니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년에는 상한 귤을 그대로 두지 말아야겠다고, 상한 귤 상자로는 어느 싱싱한 귤도 담을 수 없다고요.
당신의 상자에는 상한 귤과 싱싱한 귤이 얼마나 있었나요?
혹시 저처럼 상한 귤이 마음을 뒤덮진 않았나요?
만약, 만약 그랬다면 저와 함께 상자를 비우도록해요.
비우며 얘기합시다.
올해 참 이것저것 담느라 고생하셨다고요.
상자의 먼지를 털며,
리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