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제이-지(Jay-Z)는 단언한다. 랩은 시(詩)다. 위대한 랩 가사를 음악 없이 벽에 붙이기만 해도 보는 사람은 분명 감탄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랩의 구성 요소는 분명 독특하다. 서양 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영어와 시 형식을 사용하면서 아프리카 고유 리듬과 표현으로 색을 입힌다. 서양악기를 갖고 즉흥연주를 하는 재즈 뮤지션의 연주처럼, 우리는 래퍼의 랩이 전하는 시 세계에 홀린 듯이 빠져든다.
재즈와 클래식이 그러하듯이, 랩 가사과 전통시도 함께 비교하고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래퍼 나스(Nas)의 가사를 영미 모더니즘 시인 T.S. 엘리엇(T.S. Eliot)의 시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이런 변태나 할 법한 궁금증은 이들이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시적 장치가 어떤 식으로 미학적 쾌감을 주는지 느껴보는 데에서 달성될 수 있다. 지금 당장 엘리엇과 나스의 작품을 맛보면서 확인해 보자.
(벌써부터 군침이 싹 돈다...)
Let us go then, you and I,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zed upon a table;
그러면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펼쳐져 있을 때
T.S 엘리엇의 시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원제: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는 이렇게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으로 첫 운을 뗀다. 저녁이 마치 마취된 환자 같다고 비유하는데, 수술을 하기 직전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화자인 프루프록의 상황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다. 실제로 프루프록의 상황은 최악이다. 그는 남몰래 좋아하는 여성에게 고백을 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프루프록은 할지 말지를 수없이 고민한다. 시가 진행하는 동안 그의 자의식은 한없이 커진다. 읽다 보면 이런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대체 프루프록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I know the voices dying a dying fall
Beneath the music from a farther room.
So how should I presume?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
먼 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깔려 점점 여리게로 되다
들리지 않게 되는 목소리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내 어찌 감행할 수 있을까?
엘리엇은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라는 시 기법을 통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시인은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가상의 인물을 창작하고 그에게 가면을 씌우고 말하도록 한다. 따라서 화자는 엘리엇이 아닌 프루프록이라는 생소하지만 친근한 등장인물이 된다. 프루프록은 지금까지의 삶이 식사를 마치고 매번 휘젓는 커피 스푼처럼 별다르지 않다고 한탄한다. 여성에게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세상을 완전히 뒤바꿀 정도로 고통스럽고 압도하는 일이다. 그는 한없이 비관적이다.
엘리엇은 프루프록을 앞에 내세우면서, 시인이 직접 얘기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꼭두각시를 움직이듯이, 프루프록을 때로는 과장하고 익살스럽게 묘사한다. 독자는 이러한 화자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화자의 제한된 시야와 생각을 독자는 함께 공유한다. 화자의 한계는 곧 독자의 한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시와 화자가 만들어 낸 세상은 독자를 흡수한다.
I walked in through the back door entrance
Shocked it was unlocked, when I walked in, I smelled incense
Chased by a weed aroma, empty Guinnesses
And lipstick marks on like three empty Coronas
A pair of blue jeans on the carpet; size 12 Timberlands
난 뒷문 출입구를 통해서 갔어
열려 있어서 놀랐지, 들어갔더니 향기가
그 뒤로 밀려오는 대마초 향, 빈 기네스 병
그리고 빈 코로나 병에는 립스틱 자국
카펫 위에는 청바지가; 사이즈 12 팀버랜드
나스의 세상에서는 어떨까. “Undying”이라는 곡은 나스가 1999년에 발표한 앨범 <I Am..>의 마지막 수록곡이다. 여기서 나스는 엘리엇의 프루프록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화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정보는 그가 타고난 도박꾼이며 이제 막 자신의 여자친구의 불륜 현장을 봤다는 것일 뿐. 화자는 집으로 들어가면서 단서를 하나 둘 찾고 이를 묘사한다. 침실에서 마주한 그녀와 내연남의 모습은 화자에게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허리춤에는 9mm 권총이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언짢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난다.
Now I'm out buggin', whylin', what I'm gon' do?
Call my man Horse, meet me outside, I'm comin' through
난 화가 나서, 반쯤 미쳐있지, 이제 어쩌지?
내 친구 호스를 불러, 밖에서 보자, 가는 중이야
작품에서 극적 독백은 동네 친구 호스를 만나면서 점점 탄력을 얻는다. 화자는 호스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화자의 묘사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청자는 마치 호스가 된 것처럼 그의 입장에 몰입한다. 자신은 약혼 선물로 2만 달러짜리 반지를 몰래 준비하였는데, 그녀는 그보다 더한 깜짝 선물을 주었다고 자조한다. 화자는 이내 내연남을 손보겠다고 다짐하고 호스와 함께 집으로 다시 향한다.
Grabbed her face, say goodbye to your undercover friend
One between the eye, she's died, by mistake
Must've held the gat too tight, pointed at her face
그녀 얼굴을 붙잡으면서, 네 비밀친구와 작별해라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죽었다. 실수로 말이야
총을 너무 세게 움켜쥐었나, 그녀 얼굴로 향했어
엘리엇과 나스의 작품에서 내용적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프루프룩은 화가 난다고 해서 매그넘 권총을 쏘지 않는다. 엘리엇의 어떤 다른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폭력과 외설이 두드러지는 랩 가사의 이러한 특징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스는 자신이 쓰는 언어와 표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가사에는 어둡고 위험한 면이 분명 있다. 청자가 내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세상을 보는지 알았으면 한다.” 나스는 자신이 사는 동네 퀸즈브리지의 현실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들려주고자 하였다.
Mad shots, couldn't tell what was goin' on
Sat on the floor near my dead girl, put her in my arms
…
Kissed my lady, her blood on my lips, I said "Amen"
Put the nine to my head, pulled the hammer
Held her close, squeeze the toast
Said to her, "Now unto God, we elope... we elope”
멈출 줄 모르는 총성,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
죽은 그녀 옆에 앉았어, 팔로 감쌌지
…
입을 맞췄어, 내 입술엔 그녀의 피가, 난 말했지 “아멘”
총구를 내 머리에, 레버를 당겼어
그녀를 안으면서, 손잡이를 꽉 쥐었어
그녀에게 말했지, “신께, 우린 달아날 거야, 달아날 거야”
사건을 접수한 경찰이 오고 둘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호스는 화자에게 기관총을 하나 달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사라진다. 화자는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약혼녀의 손가락에, 미처 주지 못한 반지를 끼우면서 애도한다. 호스의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은 그녀와 같은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하늘에 기도를 올리면서 화자의 엇나간 사랑은 역설적으로 이루어진다. 곡의 제목인 ‘죽지 않는 사랑(Undying love)’처럼 말이다. 이렇듯 나스는 극적 독백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여기에 현실적인 각색을 더해 자신이 살던 동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두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은 뒤로 물러나고 화자를 앞세우며 극적 독백을 활용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작품 속 화자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있다고 가정하고,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엘리엇과 나스의 일생을 살펴보면 작품과 흡사한 부분을 여럿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첫 번째 아내인 비비안 헤이우드(Vivienne Haigh-Wood Eliot)와 하루가 멀다 하게 다투었다. 비비안은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엘리엇은 훗날 “그녀와의 결혼은 나에게 아무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회고하였다. 그 뒤로 엘리엇은 이성과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속 화자 프루프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스의 결혼 생활도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첫 번째 아내인 카르멘 브라이언(Carmen Bryan)은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났는데,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스의 영원한 라이벌인 제이-지였다. 침대에서 함께 뒹굴고 있는 두 남녀가 제이-지와 카르멘이라고 생각하면 그의 분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 몰입하여 이런저런 상상을 과감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극적 독백은 제 목적을 이루다고 볼 수 있다.
엘리엇과 나스, 두 거장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엘리엇은 20세기 초반 시인이고 나스는 20세기 후반 래퍼다. 엘리엇은 미국 중부 출신 백인이고 나스는 미국 동부 출신 흑인이다. 엘리엇은 텍스트로 작품을 내었고 나스는 레코드로 작품을 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이 뛰어난 묘사꾼이자 이야기꾼이라는 공통점에 기대어 우리는 차이를 뛰어넘는 즐거움을 얻는다.
작품 속에 깃들여 있는 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이 꾸며낸 인물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주관적인 화자가 전달하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해석을 더한다. 그래서 랩 가사와 시는 계속해서 비교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 변태적인 탐구는 앞으로.. 투비컨티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