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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량 Jul 15. 2024

상일동 이야기 1

-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공간, 잊힌 시간과 그 가치에 관한 이야기

 당신이 기억하는 당신의 가장 어린 시절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으면 순간 멍해지면서도 머릿속의 타임머신은 어느새 과거를 거슬러 오르려는 노력을 한다. 처음에는 초등학생 즈음의 특별한 날들이 떠오르고,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단정 지을 때쯤에 조금 더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과거를 거슬러 오르고 오르다가 만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나의 이야기이다. 오늘의 삶이 버거울 때, 미래가 무겁게 느껴질 때, 때론 과거가 원망스러울 때  어쩌면 나의 오래된 기억들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쁜 삶 속의 나를 치유할지도 모를 일이다.


생의 최초 기억.

 당신도 당신의 생의 최초 기억을 찾아냈는가. 그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또 다른 삶의 기억들은 무엇이었는가. 기억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것들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좋은 기억 하나, 나쁜 기억 두, 세 개가 모여 눈뭉치처럼 굴려지고 굴려지다 보면 커다랗고 그럴듯한 눈사람이 된다.


 나의 생의 최초 기억은 6살 때이다. 장소는 막내 이모의 결혼식장이다. 어두운 예식장에서 나는 엄마에게 안겨 서럽게 울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왜 우냐며 달래주시며 지나간다. 그런데 나는 사실 슬프지가 않다. 무슨 이유로 울기 시작했는지는 이미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너무 서럽게 울고 있는 나머지 이 울음을 갑자기 멈추기가 민망할 뿐이다. 왜 우냐는 사람들의 관심에 괜히 여기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누군가 무슨 이유라도 만들어 내주길 바라고 있다. 결국 사람들은 아기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서 운 것으로 단정 지었고 엄마는 나가서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때쯤 울음을 적당히 멈출 수 있었다.


 나는 아마 그날의 낯선 장소와 사람들 때문에 불편해서 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낯선 곳을 떠올리면 드는 불안한 감정이 그날의 내 기분과 맞닿아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여전히 새로운 환경이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안함을 넘어서는 기대와 설렘이 있다. 엄마와 이모는 “너 이모 결혼식에 너무 울어서 완전 못난이 인형이었다.”라고 회상하셨지만 그런 못난이 인형을 달래주던 따뜻한 분위기처럼 성인이 된 지금도 새로운 장면에서 따뜻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을 믿는다.



아쉽지만 최초가 아닌 기억들.     

 생의 최초기억을 떠올리기까지의 많은 기억들을 회상해 본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그 당시 살던 우리 집과 동네가 떠오른다. 어떤 사건을 떠올려도 사건보다 그 배경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기에 이제는 사건 말고 사물, ‘어린 시절 우리 동네’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의 동쪽 끝자락, 버스 500번의 종점이라고 불리는 한적한 곳이었다.


 우리 집 주소는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고덕주공아파트 350동 107호.


 1983년에 지어진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파트였고, 우리 가족은 1988년, 내가 5살 때 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가족이 이사를 할 때, 이모들은 왜 그런 촌구석에 집을 사냐면서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잠실도 논과 밭이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후반 강남의 개발과 더불어 강남의 베드타운으로 강동구를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잠실주공아파트 다음으로 둔촌주공아파트와 고덕주공아파트가 세워졌다.


 아빠도 무리해서 ‘새 아파트’로 가려는 엄마의 욕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우리의 새집은 아빠의 회사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덕분에 아빠는 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아빠의 모습을 베란다로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엄마는 늘 승용차를 사고 싶어 하셨던 것을 보면 아빠의 낡은 자전거를 좋아하진 않으셨던 것 같다.


 그 시절, 서울의 끝자락 주공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아등바등 서울에 터를 잡은 신혼부부가 조금은 어렵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닿을 수도 있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이사를 와서 첫 한 해는 내가 집을 너무 낯설어해서 초인종만 울려도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아마 이사한 해에는 집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막내 이모의 결혼식이 이사하고 바로 이듬해인 1989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고, 필연처럼 그것이 생애 최초기억이 되어버렸다.


 동생이 커서 아장아장 걷게 되자 엄마와 나도 집 밖으로 발걸음을 옮겨 주변 이웃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3층의 지은이와 5층의 지혜가 나의 첫 단짝이 되었다. 내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한 층씩 넓어져 갔다.


  낯설었던 장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우리 가족의 삶 전부가 되었다. 엄마는 화분도 키우고, 화려한 어항도 들여놓고, 나와 동생이 낙서할 수 있는 커다란 칠판도 한쪽 벽에다가 걸어주셨다. 새집은 익숙한 보금자리가 되어갔다. 동네 역시 우리 가족과 함께 나이가 들어갔고,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곳의 잔디와 나무도 나의 성장에 견줄 만큼 울창하게 훌쩍 커서 동네 전체가 큰 숲이 되어 있었다.

  

고덕주공아파트 3단지 모습, 2000년대 초반 촬영.

                              

 학교가 끝나서 해가 질 때까지 나는 그 숲을 놀이터 삼아서 신나게 놀았다. 자연이 내 친구이기도 했고, 친구 삼을만한 이웃도 차고 넘쳤다. 그냥 그 시대 동네가 다 그랬듯이, 위, 아래, 앞집 모두 현관문은 늘 열려 있었고, 우리 집이 비어있으면 위층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한집에 늘 모여 계시면서 어느 날은 같이 뜨개질을 하고, 어느 날은 봄나물을 다듬으시고, 또 어느 날은 인형 눈 붙이기 같은 부업을 함께 하셨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집에서 모여 놀기도 하고, 밖에 나가기도 하고, 100원 정도 용돈을 받아서 ‘라’ 상가라고 하는 상가 입구에 작은 가게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었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또 숲으로 가서 놀았다.


 우리 집은 특별히 1층이어서 베란다로 이어진 잔디밭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 넝쿨이 베란다 난간을 타고 올라 해를 거듭할수록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그 포도나무가 좋았다. 저녁 무렵, 베란다에서 포도 넝쿨을 보고 있으면 퇴근해서 오시는 아빠의 자전거가 멀리서 보였다. 부엌에서는 압력밥솥의 지글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고, 나와 동생은 아빠께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아빠의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을 때엔 그 속에 어떤 간식이 있을지 기대에 가득 찼다. 늘 그렇게 우리의 하루는 마무리되었다.


 생의 최초 기억으로부터 추측하건대 나는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을 추구하는 성향을 타고났다. 떠오르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이 몸이 다쳤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 추측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 가운데 상일동 107호 우리 집만이 안전하고 편안한 기억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공간은 훗날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었을까.

 과거의 단서들을 모아 가는 것은 현재의 내 삶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볼 때에, 나만 결말을 알고 있을 그때의, 그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므로 결말은 언제든 바꿔나갈 수 있다. 그것이 때로는 떠올리기 힘든 기억일지라도 내가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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