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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생 Sep 04. 2022

‘외계+인’이라는 산만함

2022년 여름 시즌 Big4 인상 평 릴레이_1

2022년 극장 여름 성수기가 다 지나간다.


여름 성수기는 한국 영화시장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7-8월을 버티면 9월 추석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3개월짜리 대목이다. 2022년 여름은 전통적 의미에 덧붙여 포스트 코로나 첫여름이라는 점에서 더 중요했다. 2년간 개점휴업을 끝낸 극장에 과연 예전처럼 대중들이 극장을 찾을까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5월에 선보인 범죄도시 2가 만루홈런을 날려주며 업계는 자신감을 찾았고, 여름 시즌 대격돌의 막이 올랐다.

첫 타자는 7월 20일 개봉한 최동훈의 ‘외계+인’이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오락성과 흥행력에서는 봉준호, 박찬욱을 능가하는 탑티어 감독 최동훈이라는 이름값과, 400억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작비, 한국에서 보기 드문 SF 판타지 장르, 1편과 2편을 한 번에 찍어 2년에 걸쳐 공개하는 전략까지 기대감은 충만했다. 스포일러를 극도로 경계했던 감독과 제작진의 의도대로 영화는 온갖 궁금증을 부풀렸고, 나 역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개봉날에 바로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결과는 대 실망.


‘외계+인’에 대해 길고도 많은 평을 늘어놓을 수 있겠으나, 남들이 다 하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딱 한 가지만 짚고 싶다. 이 영화는 정말 산만하다. 기승전결의 완결성이 무너졌다. 2편에서 이 산만함을 극복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올여름 개봉한 1편은 구제불능이다. 재미가 아닌 이해를 위해 관객에게 설명할 내용이 너무도 많았고, 그걸 구구절절하다 보니 길었던 러닝타임이 다 끝나버렸다.


산만하고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설정과 서사, 캐릭터가 조화롭지 못하고 제 멋대로 따로 노는 결과로 이어진다. 시장 좌판에 사과, 배, 수박, 복숭아, 포도가 놓여 있으면 서로 다른 과일이 조화를 이룬 과일가게로 인식된다. ‘외계+인’ 좌판에는 사과, 망치, 오징어, 구둣솔, 농구공이 맥락 없이 놓여있다. 뭐야 이 집은?? 그러다 보니 배우의 연기가 어떻다는 둥, 캐스팅이 적절했냐는 둥, 미술이 구리다는 둥,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과 의상이라는 둥 온갖 지적질은 1+1으로 따라오고. 실패를 모르던 이야기꾼 최동훈의 ‘외계+인’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내가 보는 원인은 이렇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SF 장르가 놓인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SF 장르는 마이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산되는 콘텐츠의 양도 부족하고 창작자는 더욱 적으며 소비자의 저변도 협소하다. 물론 마블 시리즈로 대표되는 외국산 SF 콘텐츠 소비시장은 넓은 것처럼 보인지만, 착각이다. SF가 아니라 블록버스터 시장일 뿐이다. 국내 원천 SF 콘텐츠를 즐기는 소비자는 매우 매우 소수에 불과하고, 원천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 저변이 넓지 않으면 콘텐츠 생산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영화나 TV시리즈의 완성도는 높아질 수가 없다. 영미권의 SF시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저변이 넓고 역사도 깊다. 아바타나 마블 시리즈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생산과 소비 기반이 빈약하니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많을 수밖에 없다. SF는 상상의 세계이기에 스토리와 캐릭터, 배경의 내적 외적 완결성이 정말 탄탄해야 한다.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외계인 엔지니어가 구사하는 언어가 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뜻을 숨겨 자막도 나오지 않는 이 장면 하나를 위해 제작진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에도 철저하게 세계관의 디테일을 준비할 때 관객들도 SF의 생소한 이야기와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다. 뛰어난 창작자 한 개인의 열정과 관심만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장르 자체가 생산력을 갖춘 역사와 저변이 있어야 한다.


그에 비해 영화의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고려시대 판타지는 그래도 재밌었다는 평가를 대체로 듣는다. 왜일까? 고려시대 이야기는 무협과 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 장르의 저변은 SF에 비할 수 없이 넓고 탄탄하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이 넓게 공유하는 무협, 고대설화, 도사 같은 문화적 코드위에서 캐릭터와 사건이 펼쳐지기에 이야기의 생명력이 비로소 살아 있다.


그렇다면 같은 SF로 묶이지만 좀비물은 비교적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좀비물 자체가 웹툰을 중심으로 국내 원천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의 규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새로운 세계관의 창조 범위가 비교적 협소한 좀비물의 특징도 한몫한다.


장르 원천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 저변을 고려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펼쳐버렸다가 수습에 실패한 이야기 ‘외계+인'. 결국 실패를 모르던 창작자 최동훈의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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