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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생 Sep 04. 2022

‘한산’이라는 과한 심심함

2022년 여름 시즌 Big4 인상 평 릴레이_2

여름 대작 2편은 ‘한산'이다.



전작 ‘명량 1700만이라는 대한민국 영화 흥행 1 기록을 만들어 버렸고, ‘이순신' ‘거북선'이라는 치트키를 보유하고 있으니 일정 수준의 흥행은 보장된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창작자 ‘한민' 명성이나 영향력은  덜한 상황. 업그레이드된 조선 해군의 통쾌한 스펙터클을 기억하며 역시 개봉날에 맞춰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극장을 나온  감상평은, “뭐지  심심함은?”


사실 ‘한산'은 잘 만든 상업영화의 조건을 두루 갖춘 수작이다. 대한민국 국민 전원의 촉수를 건드리는 캐릭터와 사건에, 한층 잘 구현된 해상 전투신의 스펙터클함, 주연배우들의 호연과 적절한 앙상블, 꺼림칙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 깔끔한 마무리, 눈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 하는 프로덕션 디자인 퀄리티까지 딱히 깔게 없다. 그런데도 심심하다. 극장을 나서는 첫 느낌이 ‘이걸로 1000만은 어렵겠다’였다.


전작 ‘명량'이 비판받은 지점은 ‘치사량의 국뽕과 신파'였다. 그리고 ‘한산'을 보니 지난 8년간 김한민 감독의 절규가 느껴진다. “욕 마이 무따 아이가!!” 기록적인 1760만의 흥행은 거두었지만, 정작 창작자 본인은 한 수 아래로 평가절하 당해야 했던 억울함과 짜증이 ‘한산'의 만듦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니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국뽕, 신파 싹 걷어내서 보여줄게. 담백하고 간결하게.


세상 모든 고민은 다 가지고 절규하던 최민식의 이순신은 사라지고, 말도 없고 생각도 읽히지 않는, 제발 모든 사람이 발포하라 한마디 해달라고(관객마저 속으로 발포해를 외쳤다) 절규해도 무표정하게 서 있어 보는 사람 복장 터지기 직전까지 가는 감정 제로의 박해일판 이순신이 있다. 민초들의 울부짖음도 없고, 산마루에서 치마를 흔들어 대는 벙어리 처자도 없으며, 우리가 이런 개고생을 했는지 모르는 후손들은 다 호로자식이다라고 웃어제끼는 조상도 없다.


그저 작전의 계획과 준비, (장군님만 아는) 기다림과 정확히 조준한 한방의 공격으로 전투를 끝장내는 과정만 아주 드라이하게 펼쳐진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아드레날린 폭발용 거북선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또한 전투의 과정일 뿐. ‘한산'은 압도적인 승리를 향해 진군하는 장군 이순신의 기계적인 퍼포먼스만을 다룬다. 따라서 ‘한산'은 영화라기보다는 흡사 한 편의 잘 정리된 보고서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더없이 깔끔하긴 하지만, 더없이 심심한 이야기가 돼버렸다.


‘명량'이 치사량의 국뽕과 신파로 1760만의 선택을 받은 동시에, 1760만의 입맛을 텁텁하게 만들었다면, ‘한산'은 과도한 MSG 제거로 700만의 입맛을 심심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둘 중 무엇이 맞는 선택이었을까?


그래서 국뽕과 신파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숙제가 남는다. 국뽕 역시 국가주의적 신파라는 정의를 할 수 있으니 그냥 신파로 퉁쳐서 얘기해보자. 신파는 무조건 욕을 박아주는 관람 풍토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좀 부당한 일면이 있다. 신파는 말 그대로 ‘new wave’ 즉 극 예술 창작의 새로운 기법이다. 1910년대 일본 통속극의 한 형태로 수입되어 당시 우리 정서로는 낯설던 과도한 극적 감정표현과 상황 묘사로 관람객에게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극한까지 느끼게 해주는 방식이 ‘신파'의 기원이다. 이수일과 심순애(이 조차도 실은 일본 소설이 원작이다)에서 ‘아아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나 좋았단 말인가~!!’를 외쳐대던 작법이 신파의 원형. 이것이 한국적 신파로 변형 발전되며 차곡차곡 이어지고 있다.


물론 과도한 신파는 욕먹어도 할 말 없는 싸구려 표현법이다. 그런데 관람객의 감정적 고양과 분출이라는 지점은 모든 스토리 콘텐츠가 갖는 목적과 본질이다. 강렬한 공감이든, 죽이고 싶은 반감이든 어쨌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시간과 돈을 들여 영화와 드라마, 연극을 본다. 그게 빠진 이야기를 굳이 보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나?


문제는 신파냐 아니냐가 아니라 결국 정도의 차이다.

과해서 욕먹지 않을 정도로,

부족해서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이 봐서 뻔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낯설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정도로,

옛날 구닥다리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지금 뭘 본건가 싶은 아방가르드한 세계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세련되게' ‘이해 가능하도록' 캐릭터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창작자의 능력이자 숙제다.


‘한산'은 이 지점에서 실패다.

전작의 비판을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캐릭터와 사건에 맞지 않는 세상 심심한 영화가 돼버렸다.

잊지 말자. 적당한 신파 MSG는 진짜 이야기 맛집의 핵심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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