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피랑

1. 골목의 기억

by 목마르다언덕

통영 동피랑.

비탈진 골목과 푸른 지붕, 담장을 넘나드는 바닷바람.

그곳은 내 유년이 깃든 마을이었다.

그리고 연희 누나가 있었다.

나를 감싸주던, 유일한 햇살 같은 사람...


그 시절의 나는 너무 조용했고, 조금은 상처받은 아이였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새벽마다 시장으로 나가셨다.

어린 나는 그 틈에서 자주 숨었고, 자주 무너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야 했다.

길게 이어진 골목, 나직한 담장 너머에서 나는 늘 같은 발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는, 꼭 나타났다.

“태석아, 또 늦게 가? 이리 와봐.”


그녀, 연희 누나는 내 옆집에 살았다.

중학생이었고, 뽀얀 얼굴에 긴 생머리를 늘 단정히 땋아 내린 모습이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즐겨 입었고, 말할 때면 조용히 웃었다.

동네 어른들은 ‘참 야무지고 고운 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집은 나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항상 웃음이 가득했고, 아빠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온화한 목소리와 따뜻한 눈빛, 그 집의 분위기는 언제나 포근했다.

연희 누나에겐 한 살 터울의 여동생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아이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오빠! 언니랑만 놀지 말고 나랑도 놀아줘!”

골목에서 누나와 나란히 걷기라도 하면 삐쳐서 팔짱을 끼며 따라오곤 했다.

나는 그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누나와의 시간을 뺏기기 싫어 괜히 무뚝뚝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누나는 웃으며 말하곤 했다.

“우리 셋이 같이 놀면 되지, 뭐~”

그 말이 어쩌면 나의 첫 번째 ‘가족에 대한 로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

누나는 손에 분필을 들고 말했다.

“우리 여기다 뭐 그릴까?”

우리가 자주 놀던 담벼락, 낡고 오래된 시멘트 벽 위에 작은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은 매끄럽고 둥글었다.

“무지개야. 진짜 색은 다 없지만… 그래도 예쁘지?”

“무지개는 비 온 뒤에만 생기잖아.”

그녀는 웃었다.

“그치. 근데 우리 골목에도 무지개 하나쯤 있어야지. 넌 비 많이 왔으니까.”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분필로 내 손바닥을 칠했다.

그리고 그녀의 무지개 옆에 내 손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그 순간이, 내 삶의 첫 번째 고백이었다.


며칠 뒤.

나는 배달용 가방을 메고 통영항을 달리고 있었다.

허름한 운동화는 젖은 바닷가를 수없이 오가며 이미 본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손엔 식당에서 싸준 생선 꾸러미가 들려 있었고, 바다는 축 처진 내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학교 앞 골목, 또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나와 같은 반 친구들도 있었다.

“야, 태석이다! 또 배달 가냐?”

장난스런 말투.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지나쳤다.

가정환경은 비밀이 아니었다.

술주정과 고함소리, 깨진 접시의 쨍그랑 소리는 이 골목의 밤공기를 자주 흔들었다.

그날 저녁, 어김없이 그 소리가 또 시작됐다.

“이딴 반찬을 사람이 먹으라고 한 거야?!”

탁, 그릇 깨지는 소리.

쾅,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

태석은 방 문을 닫고 귓가를 막았지만, 소리는 틈을 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도망쳐야 했다. 숨을 쉬어야 했다.

그는 맨발로 골목을 빠져나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 오래된 벽이 있는 곳.

며칠 전, 연희 누나와 무지개를 그렸던 바로 그 자리였다.

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무지개는 희미했고, 손도장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는 벽 앞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무릎을 껴안은 채, 조용히 울었다.

그때였다.

“태석아... 여기 있었네.”

연희였다.

누나는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도 돼.”

그날 밤, 태석은 처음으로 자신의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며칠 후.

학교 앞엔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연희 누나가 학교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하얀 원피스, 목에 걸린 메달, 양손에 가득 안긴 꽃다발.

동네 아이들의 박수 속에 그녀는 당당하게 걸어왔다.

나는 골목 담벼락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러웠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언젠가 나와 같은 하늘을 보지 않게 될 것 같아서.

나는 뒷골목에 핀 이름 모를 하얀 들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가가 말했다.

“축하해요, 누나.”

연희는 들꽃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야. 고마워, 태석아.”

그 미소는 내 가슴 한편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자국이 되었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

어느 저녁, 연희 누나는 조용히 말했다.

“나, 서울로 전학 가게 됐어.”

태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얼어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날, 이삿짐을 실은 트럭 앞에서 연희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태석아. 넌 괜찮을 거야. 나 없다고 울면 안 된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날 밤, 태석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무지개가 그려진 벽 아래, 밤을 지새웠다.

연희 누나는 다음 날 떠났고, 그는 가장 조용한 작별 인사를 그 자리에서 남겼다.

무지개는 지워질지 몰라도,

그녀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