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피랑

2. 흘러간 시간, 각자의 길

by 목마르다언덕

“무지개는, 다시 비 온 뒤에야 나타나는 거잖아.”

그녀가 떠나던 날, 나는 그 말을 마음속 어딘가에 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내 인생엔 너무 자주, 너무 많은 비가 내렸다.


연희 누나가 서울로 떠난 후, 골목은 낯설 만큼 조용해졌다.

동피랑은 여전히 바람이 많았고, 바다는 언제나처럼 잔잔했지만, 나의 마음엔 늘 파도가 쳤다.

누나가 떠난 뒤, 나는 혼자가 되었다. 집안의 폭풍은 여전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때로는 물건을 집어던졌다. 벽이 깨지고, 어머니가 울고,

나는 그 사이에서 도망치는 아이였다.

나는 언제나 그 무지개 벽으로 갔다. 누나와 함께 분필로 그렸던 그 벽. 앉아서 무릎을 껴안고 울었다.

그 벽만은 나를 혼내지 않았고, 손등에 생긴 상처를 물어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분노가 나를 집어삼켰다. 왜 누나는 나를 두고 떠난 걸까. 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을까.

나는 벽으로 달려가 그 위에 남은 무지개를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렀다.

색이 지워지고, 분필 가루가 손에 묻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다시 분필을 들고 벽으로 향했다. 희미하게 남은 곡선을 따라 다시 무지개를 그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낡은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집은 조용해졌다. 폭력이 사라진 집은 처음으로 평화를 얻었지만, 가난은 더 깊어졌다.

어머니는 편찮으셨고, 약국 일을 도우며 근근이 생활하셨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슈퍼마켓, 생선 배달, 폐지 수거. 손에 돈이 쥐어지면

곧장 집으로 가져갔다.

학교에서는 늘 피곤했다. 수업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였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비웃었다.

“또 자냐? 태석이는 학교에 침대 들여놔야겠다.”

나는 웃지 못했다. 그러다 점점 말이 없어졌다. 담배를 피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며 반항적인 시절을 보냈다.

평범한 사춘기, 보통의 아이처럼 성장해 가는 것 같았지만, 그 내면은 늘 허기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첫 직장으로 물류회사에 들어갔다. 새벽에 배달을 나가고, 무거운 짐을 나르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선배 직원의 갑질은 상상을 초월했다. 말끝마다 욕설과 폭언, 밤늦게까지의 무급 노동.

결국 나는 그만두고, 섬유공장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사람보다 기계가 더 많은 곳. 목덜미에 땀이 흘러도, 누구 하나 말 걸지 않는 세계였다.

일자리를 잃은 후, 나는 군에 입대했다. 자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지만, 도피에 가까웠다.

군대에서 나는 ‘무난한 병사’였다. 조용히, 묵묵히, 눈에 띄지 않게 지냈다. 전역 후,

군 선배의 소개로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처음엔 설렜다. 외국과 거래를 하고, 서류를 만지고, 영어로 전화도 받는 일상이 낯설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회사에서의 생활은 무던히 길어졌다. 어느덧 10년이 흘렀고, 나는 과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었다.

책임감 있는 역할과 후배 직원들, 정기적인 출장은 나를 조금은 어른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미혼의 삶은 외롭다는 걸 점점 더 실감하게 됐다. 퇴근 후 돌아오는 집엔 불 꺼진 거실, 식은 밥, 켜진 TV 소리만이 나를 반겼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으며 일했지만, 마음속은 늘 공허했다. 뭔가를 놓고 온 느낌, 누군가를 기다리는 감정.

어릴 적 골목, 그리고 무지개 벽이 자꾸 떠올랐다.


그 무렵, 서울에 있는 연희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여전히 미술에 몰두했다. 학교 내외의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화려한 수상 경력이 입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의 미술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캠퍼스 안에서도 주목받는 학생이었다.

성실했고, 섬세했고, 따뜻한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학 생활은 행복했다. 친구들과의 전시회, 지도교수의 칭찬, 봄날의 벚꽃 아래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들.

졸업 후, 그녀는 대학에 남아 강의 조교로 일하다가 곧 전임 강사로 채용되었다.

그 무렵, 같은 대학의 젊은 조소과 교수와 인연이 닿았다.

그는 친절했고, 잘생겼고, 무엇보다 연희에게 헌신적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내가 꼭 지켜주고 싶어요.”

그 말에 그녀는 마음을 열었고, 그들은 빠르게 결혼했다.

처음엔 모든 게 완벽했다. 반듯한 남편, 반듯한 집, 예쁜 아기.

그러나 가부장적인 시댁은 그녀의 삶을 서서히 짓눌렀다. 사사건건 간섭했고, 남편은 점점 무관심해졌다.

육아, 남편의 뒷바라지, 시댁 행사. 붓을 잡을 시간은 사라졌고, 거울 속 자신은 점점 낯설어졌다.

10년의 결혼 생활은 결국 파경을 맞았다. 아이는 남편이 키우기로 했고, 연희는 조용히 집을 나왔다.

그녀는 다시 그림을 꺼냈고, 다시 자신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오래전 무지개가 그려졌던 그 골목이 생각났다.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해 볼까.”

그녀는 통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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