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회, 다시 골목에서
통영의 바람은 여전히 바다에서 불어왔다.
봄 햇살은 언덕을 따라 골목을 비추고,
담장 위엔 고양이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태석은 케이블카 아래의 카페 '소리의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은 커피머신 위로 햇살이 내려앉고, 창밖으로는 동피랑의 골목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하루는 조용하고 단순했다. 커피를 내리고, 책을 읽고, 손님들과 느슨한 대화를 나누며, 그는 어느새
이 골목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벽에는 계절마다 바뀌는 엽서들이 걸려 있었고, 태석은 가끔 손님들에게 꽃차를 내주며
"오늘은 무궁화, 내일은 금잔화"라며 웃었다. 어쩌면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그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10년 전, 그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성실했고, 인정받았고, 어느새 30대 중반에 접어든 회사의 중간관리자였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외 거래처의 연쇄 부도로 회사는 자금난에 빠졌고, 몇 달 뒤 ‘부도’라는 단어가 전 직원의 앞에 떨어졌다.
그날,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박스를 들고 나오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군 선배와 소주를 나눴다.
"형, 나… 너무 힘들어요. 솔직히… 통영이 너무 보고 싶어요. 쉬고 싶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그냥… 좀 웃고 싶어요."
잔을 기울이며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선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내려가. 그리운 데로. 거긴 네가 숨 쉴 수 있는 곳이잖아."
그렇게 시작된 ‘소리의 집’이었다.
폐점한 찻집 자리에 작은 커피머신과 찻잔을 들여놓고, 태석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들어와 "여기 오미자차 진짜 맛있네요!"라며 웃었고,
어느 날은 아이 손을 잡은 아빠가 "우리 아기, 꽃차 마셔도 돼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하루는 통영에 사는 연희의 고등학교 친구 명희가 찻집에 들어왔다.
벽을 둘러보다가 카운터에 있는 태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너, 태석이? 나 명희야. 연희랑 같이 미술부 했던!"
태석은 잠시 놀라다가도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반가움에 짧은 안부 인사가 오가고, 명희는 카페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너 이 근처에 찻집 열었다고 들었어. 혹시 연희랑은 아직 연락하고 지내?"
태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니… 연락은 끊긴 지 오래야. 혹시 누나는? 연락돼? 잘 지내고 있는지… 가끔 궁금하긴 해."
명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가끔 문자 주고받아. 요즘은 다시 그림 그리기 시작했다더라. 통영 얘기도 가끔 해. 이 찻집 얘기도 꼭 해줄게."
그 순간, 태석의 마음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어느 늦은 오후, 태석은 카페 창가에 앉아 꽃차를 내리고 있었다.
오늘의 꽃은 금어초였다. 맑고 투명한 잔 안에 퍼지는 분홍빛.
그는 그 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창밖을 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고 따스한 빛이 골목 위를 감싸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는 조용히, 아주 오래 전의 무지개를 떠올렸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햇살보다 먼저 익숙한 향기가 들어왔다. 라벤더와 약간의 나무 내음. 그는 고개를 들었고,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
"여기… 커피 되나요?"
태석은 말없이 눈을 떼지 못했다.
연희였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 얌전한 셔츠 차림, 얼굴은 예전보다 조금 말랐지만 여전히 단정하고 고왔다. 그녀는 변한 것도 있었고,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누나..."
그 짧은 한마디에, 지난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