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되살아 나는 감
동피랑은 봄에서 여름으로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섞인 햇살 냄새가 골목을 따스하게 적셨고, 붉은 벽화 아래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연희는 통영에 도착한 이후, 매일 아침 ‘소리의 집’에 들렀다.
창가에 앉아 꽃차를 마시며 붓을 들고 스케치북을 펼치곤 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는 카페를 부드럽게 물들였다.
태석은 그런 연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그녀의 손끝, 그리고 붓이 닿는 스케치북 위의 선 하나하나에 오래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느 날, 카페 문이 열리고 명희가 다시 찾아왔다.
"연희 왔다며? 그래서 왔지. 진짜 반가워서 눈물 날 뻔했어."
연희는 명희와 포옹을 나눈 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 나눴다.
그 모습이 유난히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 오후, 태석은 연희와 함께 동피랑 골목을 걸었다. 예전 그 벽, 무지개를 그렸던 그곳에 도착하자 그녀는 조용히 앉아 바닥을 쓸어보았다.
“여기, 정말 많이 변했는데… 이상하게 그대로인 기분이야.”
태석은 미소 지었다.
“우리가 뭔가를 남긴 곳은, 쉽게 변하지 않나 봐.”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태석아… 나는 가끔, 그 시절이 나에게 가장 따뜻했던 시간이었단 생각을 해.”
그 말에 태석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울렸다.
며칠 후, 비가 내렸다.
카페 안에서는 차분한 음악이 흐르고, 유리창엔 빗방울이 맺혔다. 연희는 무궁화꽃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엔 무지개가 생긴다, 그랬었지?”
태석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때 무지개 그렸던 날도, 이런 날이었지.”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나, 그 벽에 다시 무지개를 그리고 싶어.”
그날 오후, 그들은 다시 함께 그 벽 앞에 섰다. 연희는 붓을 들고, 태석은 분필을 쥐었다. 다시 선을 긋고, 다시 색을 입혔다. 무지개는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벽 위에 피어났다.
연희는 붓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표정엔 오래간만에 피어난 미소가 가득했다.
진심으로 몰입한 얼굴, 색을 고를 때마다 환하게 웃는 모습. 태석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묘하게 일렁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무지개를 그리고 나서 분필가루 묻은 손으로 웃던 소녀. 그 기억과 지금의 연희가 겹쳐졌다. 가슴이 찌릿하게 아팠지만, 그 속엔 따뜻한 기쁨도 함께 있었다.
“네가 이렇게 웃는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태석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돌렸다. 붓을 든 채로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태석아.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다시 이 벽 앞에 설 수 있어서.”
그림이 완성되었을 즈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노을과 벽화가 어우러지며 벽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다시 여기에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은 몰랐어.”
연희가 말했다.
“그림은 사라져도, 마음은 남으니까.”
태석의 대답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며칠 뒤, 연희는 조심스럽게 카페 바깥 벽을 가리켰다.
“여기도, 그려볼까? 네 찻집이잖아. ‘소리의 집’엔 어울리는 무지개가 있어야지.”
“정말 괜찮을까?”
“물론이지. 이번엔, 희망을 담은 무지개야.”
그녀는 작은 붓을 들고 벽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번 무지개는 전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이었다.
빨강보다는 연한 분홍, 파랑보다는 잔잔한 하늘빛.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페 앞, 새로운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희의 얼굴엔 다시 진한 미소가 퍼져 있었다.
태석은 그 곁에 서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는, 이 무지개를 지키고 싶다.”
그날 저녁, 벽화 작업을 마친 둘은 통영 중앙시장 안의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싱싱한 회가 담긴 접시와 소주 한 병.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마음만큼은 묵직하고 진지했다. 벽화가 완성된 후의 기쁨이 고스란히 잔에 담기는 듯했다.
태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꽤 멋있게 나왔지? 가게 벽 말이야.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가더라."
연희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공허했다.
“응. 정말 예쁘더라. 마치 진짜 무지개가 걸린 것 같았어.”
그러나 그녀의 눈빛엔 흐릿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지개를 그릴 땐 그렇게 환하게 빛나던 얼굴이, 지금은 어딘가 흐려져 있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연희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시장의 붉은 간판 불빛들이 흐릿하게 깜빡이고, 바깥바람에 커튼이 흔들렸다.
태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방금 전이랑은 좀 달라 보여.”
연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벽화 그리면서는 정말 행복했는데, 이게 내 진짜 마음일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그녀는 천천히 잔을 들었다. 그 안엔 바닷물처럼 쓴 술이 담겨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 살아 있는 것 같긴 해. 너랑 얘기 나누는 이 순간도 따뜻하고. 그런데 내 안에 아직 다 빠지지 않은 어두운 것들이 있어. 그게 자꾸… 나를 끌어내리는 것 같아.”
태석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릿해졌다. 무지개처럼 웃던 그녀의 표정 속에 감춰져 있던 그늘, 그걸 보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녀는 일부러 더 밝게 웃고, 더 많이 말하며, 자신을 설득하려 했던 건 아닐까. 그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회를 한 점 집었다. 바다에서 막 올라온 듯 싱싱한 살점이었지만, 입 안에선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잔잔한 음악이 식당 안에 퍼지고, 바깥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연희는 다시 소주잔을 비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무지개가 아닌 어둠의 끝을 응시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