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로의 상처, 그리고 결심
비가 그친 다음 날, 동피랑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벽화가 많이 그려진 골목에는 활기가 넘쳤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었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녔고, 색색의 그림 앞에서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찻집 ‘소리의 집’에도 매일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연희가 그린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예쁘다", "감성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서, 태석은 연희를 바라보며 문득 걱정에 잠기곤 했다.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연희.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머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자주 멈춰 서서
멀리 어딘가를 헤매는 듯했다.
그 웃음은 마치 얇은 유리막처럼 가볍게 깨어질 것 같았고, 태석은 그 안에서 쓸쓸한 침묵이 일렁이는 걸
느꼈다.
그 미소는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한, 그러나 정작 자신은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의 미소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눈빛. 그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땐 환하게 빛났지만, 붓을 내려놓은 후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어릴 적 누나는 항상 나를 지켜줬었는데…’
태석은 조용히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누나를 지켜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내 공허함을, 누나가 대신 채워주고 있는 걸까?’
그 생각에 태석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에게 아무 말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 자신도 모르게 누나에게 기대고 있는 감정. 누나는, 알고 있을까?
바쁜 하루가 지나고, 태석은 연희가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무지개가 그려진 벽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그 속에 갇힌 사람처럼 보였다. 색채는 밝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채색인 것처럼.
그날 밤, 태석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 무지개는 아직 선명했지만,
그 아래에 선 누나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태석은 카페 문을 열며, 무지개가 걸린 외벽을 올려다보았다. 연희가 남기고 간 색들은 햇빛 아래 더 선명해 보였다. 그는 잠시 멈춰 그 벽 앞에 서 있다가, 문득 어젯밤 연희의 말이 떠올랐다.
“…내 안에 아직 다 빠지지 않은 어두운 것들이 있어.”
그 말은 태석의 마음속에 오래 맴돌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무지개를 그리는 동안만큼은 생기가 돌았지만, 잔을 기울일 땐 어딘가 달랐다. 마치, 자꾸만 자신을 속이려는 사람처럼.
며칠이 지나고 연희는 다시 카페를 찾았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부드럽게 풀어내린 모습이었다. 카페 안은 따뜻한 햇살로 가득했고,
창가 자리에 마주 앉은 둘은 자연스럽게 차를 나눴다.
“잘 자고 일어나니까 조금은 괜찮더라.” 연희가 말했다.
“요즘은 그림 그리는 시간 외에도, 그냥 이렇게 있는 것도 좋고. 그래서 무서워.”
“무서워?” 태석이 물었다.
“응. 이렇게 잠시 쉬는 것도… 나중에 다시 혼자일 때 더 힘들어질까 봐. 내가 잠시 행복했던 걸 후회할까 봐.”
태석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고,
그 마음속 깊은 골짜기엔 아직 말하지 못한 고통들이 남아 있었다.
그날 오후, 연희는 카페 앞 벤치에 앉아 노트를 꺼내기 전, 잠시 벽화를 마무리하던 붓을 내려놓고 카페 안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태석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묵묵히 손님을 응대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태석.
그 순간, 연희는 문득 마음속에 가볍게 울컥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 이 잠깐의 내 행복을, 태석이 채워주고 있구나.’
그는 어릴 때처럼 여전히 착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만들어 주고, 말없이 들어주고, 내가 행복해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사람.
그리고 문득, 잊고 있던 장면들이 연희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릴 적,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면 밤늦게 학교로 달려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선생님 몰래 분필을 가져다주던 태석.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고 돌아오면, 온 동네에서 꺾어온 꽃들을 집 앞에 두고 가곤 했던 아이.
그리고 어느 날, 집 앞 화단에 몰래 심어둔 꽃들 사이에서 가장 예쁜 꽃 한 송이를 꺾어 수줍게 내민 그 모습.
그 아이가 지금 이 사람이라는 사실이, 문득 가슴을 아리게 했다.
연희는 붓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림의 마지막 곡선을 천천히 덧그렸다.
태석은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가섰다.
“무슨 생각해?”
연희는 노트를 덮으며 웃었다.
“그냥… 나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잊지 말라고.”
며칠 뒤, 연희는 부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통영에 잠시 머물기 위해 온 것이었고,
처음부터 오래 머물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연희는 알았다. 지금 태석 앞에 서 있는 자신은, 과거보다 더 약해져 있었다는 걸.
그의 따뜻함과 배려, 묵묵한 위로가 고마우면서도 두려웠다.
만약 이대로 그에게 기대어 다가선다면, 그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지금까지 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달려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걸 잃었어. 사랑도, 여유도, 나 자신조차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행복하지 못한 내 모습으로 태석에게 다가가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일지도 몰라.
그 애는 언제나 나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기만 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야. 이 자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태석의 마음은 조용히 일렁였다.
카페 마감 시간,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벽 앞에 나란히 섰다. 연희는 그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벽… 다음에 또 그릴 수 있을까?”
“언제든지 와. 이 자리는 항상 비워둘게.”
태석의 말에 연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오래도록.
“태석아.”
“응?”
“넌 참 좋은 사람이야.”
그 말 뒤에 이어질 것을 태석은 기다렸다. 그러나 연희는 그저 조용히 웃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엔 감사와 미안함, 그리고 단념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녀는 태석의 마음을 알았고, 자신도 그 감정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현실이 있었다.
그녀의 지난 삶과 감정은 아직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다음 날, 태석은 혼자 벽 앞에 섰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연희가 떠난 후 처음으로 무지개 앞에 섰다. 그녀가 남긴 색은 여전히 생생했고, 그 아래를 스쳐가는 바람엔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태석은 벽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릴 적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의 폭행과 냉담한 현실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연희 누나였다.
그 존재 하나만으로 통영은 늘 보금자리였고, 무지개처럼 마음을 비추는 따뜻한 빛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 떠나지 말라고. 나와 함께 있어달라고.
하지만 태석은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는 누나를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녀의 따뜻함에 기대고, 그녀의 미소를 갈구하며 살아온 아이였다.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건 어쩌면 죄일지도 몰라.’
태석은 스스로에게 그 말을 속삭이며 고개를 떨궜다. 어릴 적 누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지금의 감정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이 자라서 사랑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죄의식처럼 다가왔다.
그녀가 나를 감싸줄 때, 나는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은 게 아니라, 다시 갈구하고 있다는 걸… 태석은
그 이기심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상처투성이인 자신에게 기대기보다, 자신이 아닌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슬픔을 덜어주기보단, 그 슬픔에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죄처럼 느껴졌다.
그는 입을 열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너무 늦어버릴까 봐, 아니면 너무 빨라질까 봐.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각자의 고백은 너무 다른 생각 위에 놓여 있었기에,
서로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지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춘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작은 붓을 들고, 무지개의 아래쪽에 조심스럽게 글자를 적었다.
‘그리움은 지나가도, 기억은 남는다.’
그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녀를 위한 희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녀를 위한 희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