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초코 이야기

에피소드 1. 불빛 아래, 다시 시작

by 목마르다언덕

"내 이름은 초코. 이 골목에서 제일 귀엽고, 제일 멋진 고양이야. 다들 나를 좋아해.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거든! 말은 못 해도 괜찮아. 난 눈빛과 꼬리로 마음을 전하니까. 누구든 마음이 울적해 보이면, 나는 조용히 곁에 있어. 쓰다듬는 손끝에 담긴 슬픔도, 떨리는 숨결 속 작은 눈물도… 난 다 알아. 그래서 오늘도, 이 골목을 걷는 거야. 누군가의 마음을 살짝 안아주려고."


1

골목의 밤은 조용했다.

낡은 가로등 아래, 희미한 주황빛이 바닥을 비췄다.

바람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돌아섰고, 철문은 녹슨 소리로 제 존재를 알렸다.

그 안에서 마지막까지 엔진을 손보던 사내가 조용히 작업등을 끄고 나왔다. 그의 이름은 박창수. 한때 '창수 카센터'라는 커다란 간판 아래서 하루 종일 바쁘게 살던 정비소 사장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없는 정비소 구석, 지인의 가게에 얹혀살듯 하루하루 임시로 일을 하며 살아간다.

손에 기름때는 여전하지만, 그 손을 바라보는 눈빛엔 자신감이 사라졌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조용히 정비복을 벗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말없이 소주 두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대에 서 있던 알바생 진우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술... 조금만 드세요. 밤마다 혼자 드시는 거, 좀 걱정돼서요."


창수는 피식 웃었다. "이젠 습관이 됐나 봐."

진우는 선반 아래에서 도시락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거 날짜는 좀 지났는데, 먹어도 되는 거예요. 따뜻하게 데워드릴게요. 안주로 드세요."

창수는 말없이 도시락을 받아 들며 고개를 숙였다. 편의점을 나선 그는 곧장 정비소로 향했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낡은 탁자에 앉아 소주병뚜껑을 하나씩 열고, 도시락을 옆에 두었다.


그가 잔을 채우려는 순간, 유리창 너머로 느릿한 움직임이 보였다. 정비소 앞 가로등 불빛 아래, 초코가 조용히 앉아 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따뜻하고 묵직했다.

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비소 문을 열었다. "들어와, 초코야. 바람 차다."

초코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창수는 미리 구석에 마련해 둔 사료 그릇과 물그릇을 꺼내 초코 앞에 놓았다.


"너는 이거 먹고, 나는 이거 먹고... 오늘도 우리 친구 하자."


그는 초코를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초코는 사료를 한 알씩 씹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창수는 멍하니 초코를 바라보다가, 초코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피식 웃었다.


"왜, 또 술 마시나 싶어? 안주는 괜찮다. 오늘은 사람 밥 먹는다, 초코야."


초코는 여전히 창수를 바라보며 조용히 몸을 말았다. 창수는 도시락을 열며 중얼거렸다.


"우리 둘 다, 별 거 아닌 하루를 버텼으니... 이 정도는 괜찮잖냐."


2

초코와의 인연은 이 정비소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던 날 밤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혼자 앉아 술을 마시던 창수는 문득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괜히 눈시울을 훔쳤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조용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그의 다리에 머리를 부비고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인 그는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초코였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고양이. 아무 말도, 아무 요구도 없이. 그날 이후 창수는 이 고양이를 초코라 불렀고,

언제부턴가 정비소가 마칠 무렵이면 늘 찾아와 있었다.

초코는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눈이 유난히 큰 길고양이였다.

사람을 잘 따르는 녀석. 누군가는 개냥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복덩이라 불렀다.

하지만 창수에게 초코는 단 하나, 침묵의 친구였다.


"또 와 있었네. 추운데 말이야."

창수는 초코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매일 이 시간에 이곳에 오니? 내가 걱정되니?"

초코는 꼬리로 바닥을 툭툭 치며 창수를 바라보았다. 창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밖에 없구나. 나를 걱정해 주는 건... 너 하나네. 고맙다, 초코야."

그는 고양이 앞에 앉았고, 초코는 그의 무릎 위에 털썩 올라앉았다. 그들의 밤은 그렇게 시작되곤 했다.


3

창수는 7년 전, 자신이 운영하던 카센터가 화재로 전소되던 날을 잊지 못한다.

새벽 2시, 불길은 기계유와 케이블을 삼켜 단 20분 만에 모든 걸 무너뜨렸다.

보험도 없었다. 그날 이후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고, 창수는 홀로 남겨졌다.


화재 이후 건물주는 화재 책임이 창수에게 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왔다.

억울했지만, 말할 힘도 싸울 여유도 없었다. 법률 용어로 가득한 문서를 읽기도 힘들었고,

매번 도착하는 출석 요구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인의 정비소에 일하러 나간 어느 날, 차를 맡기러 온 건물주가 창수를 발견하고

정비소 안으로 들어오다시피 다가와 소리쳤다.

"아직도 이 바닥에 기어 다니고 있나? 당신 때문에 내가 입은 손해가 얼마인 줄 알아?

내 차는 딴 데 맡길 걸 그랬어."

창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인은 당황해하며 중간에 나섰지만,

건물주는 창수를 노려보며 독하게 쏘아붙였다.


"양심이 있으면 조용히 사라지든가. 이런 데서 어슬렁거릴 자격도 없는 사람 아니야?"


그 말은 창수의 가슴을 도려내듯 깊게 남았다. 그날 밤, 그는 초코 앞에서 소주 병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이런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초코는 묵묵히 그의 곁에 앉아, 머리를 가만히 그의 무릎에 기댔다.

아무 말도, 위로도 없이. 그저 함께 있었다.


이따금 꿈에서도 불이 붙은 리프트가 보이고, 무너진 천장이 내려앉는 장면에서 깨어난다.

그는 폐인이 될 뻔했지만, 후배의 손을 잡고 다시 정비소 바닥을 밟았다.

다만, 예전의 창수는 거기 없었다.

요즘은 지인의 정비소도 사정이 나쁘다. 경기가 식고 정비받는 차량 수가 줄면서 하루하루 버티기 급급했다.

부품 창고는 텅 비어 가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받지 못한 지 오래였다.

지인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곤 했고, 자주 허리를 잡고 한숨을 쉬었다.

창수는 미안함에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지인은 마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 나도 솔직히 힘들어. 자다가도 숨이 턱 막혀. 근데, 형 없으면 더 버거워.

힘들 때 같이 버텨야 진짜 동료지. 우리 같이 나중에 웃자."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에는 깊은 피로와 힘듦이 어려 있었다.

창수는 지인 동생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동생에게 기대면서도, 동시에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자꾸만 자책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웃으며 말했다. "너 덕분에 버티고 있어. 진심이야. “


정비소 옆 편의점에서 일하던 취업준비생 진우는 창수를 처음 보았을 때, 그저 무뚝뚝한 아저씨로만 여겼다. 말도 없고, 늘 같은 작업복에 같은 표정. 하지만 어느 날, 골목을 지나가던 중 창수의 무릎 위에서 조용히 졸고 있는 초코를 보고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진우는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고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자격증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는 취업 문제로 다투다 끝내 이별했고, 낮에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무원 학원에 다니는 일상이 반복됐다.

최근 들어 편의점 사장은 진우에게 야간 근무까지 맡기려는 압박을 더해왔다.


"자네 공부도 좋지만, 사람 구하기 힘든 거 알잖아. 밤에도 좀 나와줘. 잠 좀 덜 자면 되잖아."


진우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자책감과 무력감이 커져만 갔다.

며칠 후, 학원이 없는 날 밤 진우는 야간 근무에 투입됐다. 조용하고 한산한 매장 안에서 그는 지친 눈을 감은 채 졸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러고도 될까...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깊은 피로에 한숨을 쉬던 그 순간, 유리문 밖에서 초코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앞발로 문을 툭툭 두드렸다. 진우는 놀라 창밖을 바라보았고, 초코는 꼬리를 세우고 유리문 앞에서 몸을 부드럽게 비비며 익숙하게 인사했다.

문을 열자 초코는 성큼 들어와 진우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고, 카운터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진우는 초코를 안으며 웃었다.

"그래, 너라도 내 편인 것 같다. 고맙다, 초코야."


4

며칠 후 어느 야간 근무 중, 초코는 또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진우는 반가운 마음에 초코를 안아 올리며 웃었고, 초코는 익숙한 듯 그의 품에서 골골 소리를 냈다.

간식을 챙겨주고 카운터 의자에 초코를 앉힌 찰나, 문이 열리고 정비소에서 일을 마친 창수가 들어섰다.


그는 진우와 초코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진우는 놀라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아, 아저씨! 초코가 갑자기 들어와서요..."


창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참 사람 좋아하네. 여기까지 왔네."


두 사람은 말없이 웃었고, 초코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편의점 안 공기는 유난히 따뜻했다.


진우는 초코를 안고 물었다. "아저씨, 초코 이름은 누가 지은 거예요?"

"누가 지은 건 아니야. 어느 날 보니까 초콜릿 색깔 같아서 그냥 '초코'라고 부른 거지.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 따라 부르더라고."

진우는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진짜 잘 어울려요. 초코라는 이름. 사람 마음까지 달달해지는 기분이에요."


5

비 오는 밤, 진우는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불이 켜진 정비소 앞을 지나치다 발걸음을 멈췄다.

창문 너머로 창수가 작업을 마무리하는 모습과 초코가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조심스레 열자 초코가 달려와 그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반겼다.

"어, 진우 왔냐. 비 오는데 괜찮아?"

"네, 학원 끝나고 그냥 지나치기 뭐해서요. 불빛 보니까... 반갑더라고요."

창수는 초코에게 사료를 부으며 말했다. "초코 덕분에 네가 또 왔네. 녀석이 사람을 데려오는 재주가 있어."


진우는 우산을 접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저씨, 저 알고 있어요. 예전에 여기 골목에서 제일 큰 정비소 하셨던 거. 기술 좋고 손 빠르고, 믿고 맡기는 곳이었다고 들었어요."

창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조용히 웃었다.

"예전 이야기다. 지금은 이렇게 네 도시락 얻어먹고 있는 신세인데."

진우는 초코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알아요. 그런 분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어요.

아저씨는 분명 다시 잘 되실 거예요."

창수는 말없이 진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너야말로...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는 거, 대단한 거야. 꼭 좋은 결과 있을 거다."

초코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몸을 말고 웅크렸다. 빗소리는 계속됐지만,

정비소 안은 오랜만에 따뜻한 공기로 가득했다.


"아저씨는 그렇게 힘든 시간에도 어떻게 버티셨어요?"

진우의 물음에 창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족이지 뭐... 멀리 있어도 가족 생각하면 버텨야지."

그는 초코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이 놈도 있구나.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 내가 힘들어 술 마실 때마다

이놈이 무릎 위에 와서 자. 그 순간만큼은 내가 쓸모없는 인간 같진 않거든."


진우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초코를 쓰다듬었다.

"저, 이번 달 시험이에요. 피곤하긴 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모님께 '당당하게 합격했다'는 소식 전해드리고 싶어요. 꼭 합격해서 떳떳한 아들이 되고 싶어요."

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진우 너는 해낼 거야. 이 행운의 마스코트가 있잖아."

그는 초코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붙으면 네 이름으로 초코 이름표 하나 새겨주고 가."

진우는 웃으며 답했다. "이름표만 해주겠어요? 초코 집도 하나 만들어줘야죠.

그럴 자격이 있는 고양이니까요."

두 사람은 초코를 보며 함께 웃었다. 초코는 조용히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꼬리를 흔들었다.


6

몇 달 후, 창수는 놀라운 연락을 받았다. 과거 화재의 원인을 다시 조사한 결과, 건물의 노후화와 전기설비 문제가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고, 일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지인은 창수에게 기뻐하며, "형, 우리 자리 하나 알아봤어. 반반씩 투자해서 다시 제대로 해보자. 형 기술이면 금방 사람들 다시 모여. 형수님도 부르고, 예지도 같이 오라고 해. 우리 다 같이 잘 살아보자. 형은 그럴 자격 충분히 있어."

창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너졌던 시간들이 조용히 회복되는 소리가 들렸다.


한편, 진우는 마침내 사회복지직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첫 발령지는 다름 아닌

이 동네의 복지센터였다.

점심시간, 복지센터 뒷 주차장의 벤치에 앉아 있는 초코를 발견한 진우는 다가가 옆에 앉았다.

"초코야... 나, 해냈어."

그는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간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힘들고 외로웠던 날들, 그 곁에 조용히 있어주던 초코. 그 존재만으로 버틸 수 있었던 시간.

초코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7

어느 날, 진우가 초코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젊은 여성이 서류를 떼러 복지센터에 들렀다가

벤치 위의 고양이를 보고 다가왔다.


"혹시... 이 고양이, 초코 아니에요? 아빠가 자주 말하던, 그 고양이 같은데..."


진우는 놀라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박창수 아저씨 따님이신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초코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초코는 조용히 그들 사이에 앉아 꼬리를 말고 졸고 있었다.


8

며칠 뒤, 진우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새로 생긴 정비소를 찾았다. 간판엔 '창수모터스'라는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문을 열며 그는 웃었다. "사장님, 장사 너무 잘되시는데요?"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창수는 장갑을 벗으며 활짝 웃었다. 그 얼굴엔 예전과는 다른 여유와 기운이 가득했다.

사무실 안, 창수의 딸 예지는 행정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 한 켠엔 작은 고양이 집과 물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엔 조용히 누워 있는 초코가 있었다.

초코의 목에는 은은히 빛나는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행운의 초코]

진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랜 시간 함께 버텨준 친구이자, 모두를 이어준 존재.

초코는 살짝 눈을 뜨더니 진우를 바라보고,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초코의 짧은 내레이션

“누군가는 다시 일어나는 데 힘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그 곁에 있어줄 이유가 필요하다.

난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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