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초코 이야기

에피소드 2. 내일을 기다리는 벤치

by 목마르다언덕

1

서울 외곽의 작은 공원. 개발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이곳은 낡은 벤치와 잿빛 도로, 우거진 나무 몇 그루가 어울려 도시의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 그런 풍경 속, 매일 같은 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노인이 있다. 머리가 희끗한 작은 체구의 박씨 할머니다.

박씨 할머니는 젊었을 때 남편과 이혼한 뒤 홀로 딸 하나를 키웠다. 보험일을 하며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밤이면 식당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보험 영업이 체질에 맞지 않아 수입은 늘 빠듯했고, 아이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딸은 무사히 성장해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연락이 끊겼고, 지금은 이젠 없는 전화번호 하나와 마지막으로 온 편지의 주소가 전부다.

그 주소만을 믿고, 할머니는 매주 편지를 보낸다. 글씨를 쓰는 게 어려운 날은 파얄에게 부탁한다. 파얄은 할머니의 입을 통해 내용을 듣고, 조심스럽게 그 마음을 한 글자씩 적는다.

“이번엔 꼭 답장이 올지도 몰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은 자꾸만 구름 쪽을 향한다.

2

벤치에서 멀지 않은 동네의 작은 고물상. 그곳에서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파얄이 일하고 있다. 한국에 온 지 4년째. 지금은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조심스레 살아간다. 그에겐 네팔에 노부모와 아내, 그리고 다섯 살 된 아들이 있다.

파얄의 고향은 전화가 잘 닿지 않는 오지이다. 하루하루가 연결되지 않는 외로움이지만, 한 달에 한두 번 겨우 이루어지는 영상통화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그날만큼은 하루 종일 웃음을 머금고 일을 하고, 그날 밤엔 초코와 함께 벤치에 앉아 조용히 하늘을 본다.

파얄은 매달 생활비를 네팔로 송금하고, 자신은 최소한으로 먹고 쓰며 살아간다. 언젠가 네팔에 돌아가 식당을 차리는 게 그의 꿈이다. 하지만 아직 2~3년은 더 돈을 모아야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파얄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의 내일을 생각하면 지금의 힘듬은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다.

3

봄기운이 가득한 어느 날, 파얄은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과 작은 우유 하나를 사 들고 공원으로 나왔다. 따스한 햇살 아래 벤치엔 여전히 박씨 할머니와 고양이 초코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날 파얄은 김밥과 우유를 들고 벤치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머니, 식사... 했어요?"

어눌한 한국말이었지만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박씨 할머니는 파얄이 내미는 작은 도시락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 착한 친구야, 내 마음은 네가 다 안다. 고맙다. 잘 먹을게."

그들 사이, 초코는 조용히 꼬리를 감고 앉아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들의 대화를 듣는 듯, 편안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며 졸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파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오늘은... 딸, 편지 왔어요? 연락... 있었어요?"

박씨 할머니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오늘도 없네. 뭐, 내일은 오겠지... 그래도 기다려봐야지."

그 표정에는 익숙한 체념과 씁쓸한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파얄은 조용히 할머니 옆에 앉으며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 힘내요. 딸이... 연락 안 되는... 사정 있을 거예요. 할머니를 잊은 건... 아닐 거예요."

박씨 할머니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

그녀는 이내 파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야말로... 네 고향 가족들이 널 기다리고 있을 텐데. 보고 싶겠지? 얼마나 외롭겠어. 괜찮니, 파얄?"

"네. 많이요. 한 달에... 두 번? 영상통화 돼요. 그날은... 정말 기뻐요."

그 순간 초코가 야옹하고 작게 울며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박씨 할머니와 파얄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4

파얄은 매주 토요일마다 박씨 할머니가 손수 꼬깃꼬깃 적은 편지를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어주었다. 할머니는 흔들리는 손으로 작은 글씨를 눌러썼고, 파얄은 그 편지를 받아 공원 근처 우체국에 가서 직접 보내주곤 했다. 보내기 전, 두 사람은 함께 봉투를 조심스레 살피며 마치 기도를 올리듯 그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매일 우체통을 확인하던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한다.

“이번 주도 없네. 다음엔 오겠지. 다음엔.”

5

어느 날, 파얄은 고물상에서 일을 하던 중 박씨 할머니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희미했다.

"파얄아... 나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놀란 파얄은 곧바로 고물상 사장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허둥지둥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할머니는 창백한 얼굴로 이불에 누워 있었다. 파얄은 주저하지 않고 할머니를 업고 근처 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파얄은 할머니를 등에 업은 채 비탈진 골목길을 달렸다. 쏟아지는 땀과 눈물이 얼굴에 뒤섞였고, 그의 숨은 거칠게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꼭 깨물던 입술을 떨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 순간, 파얄의 머릿속에 고향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오래전 자신을 업고 병원을 오가던 어머니의 등이 스쳤고, 그는 더 세게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줘요, 할머니..."

병원 도착과 동시에 아무 간호사에게 숨 가쁘게 말했다.

"할머니... 아파요... 갑자기... 많이 아파요. 도와주세요... 빨리요."

서툰 한국말이었지만, 그의 눈빛과 절박한 표정은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았다. 의료진은 즉시 들것을 준비해 할머니를 응급실로 옮겼다.

할머니는 점차 건강을 회복하였고, 매일 저녁이 되면 파얄은 할머니의 집을 찾아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식사 준비를 돕고 약을 챙기며, 이불을 펴고 창문을 닫는 일까지 하나하나 살폈다. 때로는 곁에 앉아 네팔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치 자신의 친어머니처럼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요. 내일은 더 따뜻할 거예요. 힘내세요."

박씨 할머니는 그런 파얄의 모습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초코는 익숙하게 그들 사이에 눕거나 무릎 위로 올라와, 말없이 그 시간을 함께했다.

그 날의 사진이 누군가의 휴대폰에 담겨 지역 SNS에 퍼졌고, 곧 지역 언론에 ‘길에서 만난 인연, 이주노동자의 아름다운 선행’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가 되었다.

6

며칠 후,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파얄은 긴장했지만, 돌아온 건 뜻밖의 결과였다. 지역 시민단체의 도움과 여론의 뒷받침으로 파얄은 특별 체류 허가를 받게 되었고, 복지센터에서는 그와 돌봄이 필요했던 박씨 할머니를 위한 작은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할머니, 이제 같이 살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박씨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우리... 가족이네.”

그 이후, 파얄은 복지센터의 지원을 받아 합법 체류 비자를 신청했고, 곧 네팔에 있는 가족을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매일 밤 창가에 앉아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가 이제 한국에서 당당히 일해. 곧 너랑 엄마도 올 수 있어. 기다려, 내 아들.”

박씨 할머니는 초코를 무릎에 앉히고, 파얄이 우체국에서 보내주는 편지가 언젠가 딸에게 도착하여 답장으로 가져다주리라 믿으며 오늘도 벤치 공원벤치에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7

초코의 짧은 내레이션: “사람은 기다리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멀어진 가족의 소식을, 누군가는 다시 만날 날을. 나는 그들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은 없지만, 나를 쓰다듬는 손끝의 떨림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함께 있는 것. 그 기다림이 덜 외롭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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