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라이드 치킨 예찬
“나는 그저 혀끝의 쾌락에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지금 내 앞에는 황금빛으로 태닝 된 치킨 한 마리가 놓여 있다. 이건 명백한 ‘비윤리적’ 상황이다. 식욕이라는 본능을 거세당했어야 할 내가, 어느덧 배달 누적 금액 20만 원을 돌파했다.
변명을 하자면 이것은 식욕이 아니다. 미학적 탐구다.
‘튀긴다’는 조리법은 신발도 맛있게 만들지만, 그 중에서도 닭고기는 다르다. 그들은 기름이라는 유체 속에서 튀김옷이라는 ‘갑옷’을 입고 재탄생한다. 나는 이 튀김옷의 텍스처를 사랑한다.
오! 자세히 보라. 공장에서 찍어낸 매끈한 소시지 따위는 흉내 낼 수 없는 저 불규칙한 크랙(Crack)들을. 마치 트럭 방수천을 재활용해 만든 ‘프라이탁(Freitag)’ 가방의 유일무이한 패턴과도 같다.
어떤 부분은 바삭하게 솟아있고, 어떤 부분은 기름을 머금고 진하게 함몰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이 빚어낸 조형미다. 나는 치킨 다리를 들고 프라이탁 ‘라씨(Lassie)’를 고를 때처럼 신중하게 그 표면을 관찰한다. "음, 이쪽 튀김옷의 에이징이 훌륭하군."
혹자는 묻는다. "양념치킨은 안 드세요?"
나는 본질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후라이드를 좋아한다. 진정한 미식의 윤리는 ‘후라이드’에 있다. 소금만 살짝 찍어 닭 본연의 육향과 튀김유의 고소함이 혀 위에서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을 이루게 해야 한다. 붉은 양념으로 눅눅해진 껍질은 나에게 있어 미적 타락이다.
치킨 무를 뜯는다. 하얀 무는 차갑고 단단하다. 한 입 베어 문다.
‘아삭.’
치킨도 베어문다
‘바삭’
이 소리는 지난 한 달간 200명의 생기부를 쓰느라 너덜너덜해진 나의 멘탈을 잡아주는 소리다.
단순한 파열음이 아니다. 내 몸속 혈관이 외친다. "주인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뇌의 쾌락 중추는 이미 윤리적 판단 기능을 상실했다.
나는 닭 다리를 뜯으며 생각한다.
인간은 왜 사는가? 매일 일기를 쓰고, 미래를 계획하는 이 모든 이성적인 행위들이, 고작 이 기름진 닭 한 조각이 주는 원초적 행복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비극이 아닐까?
다이어트? 잠시 잊는다.
지금은 이 바삭한 비윤리를 즐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