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당신도 저를 참아주고 계셨군요!

'나만 참는다'는 오래된 착각이 무너지던 순간

by 김삼월

나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A의 이야기는 내 기준에선 이미 한참 전에 끝났어야 했다. A는 끊임없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고, 허공만 맴도는 것 같았다. 나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이기만 했다.


주변 테이블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경쾌한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소음이 슬슬 귓가에 거슬릴 무렵, 내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손가락은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의 겉면만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이 이야기의 끝은 어디일까?‘


그때까지 나는 나의 이 무거운 침묵이 아주 이성적이고 세련된 인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데 한창 열을 올리며 말하던 A가 문득 이야기를 멈췄다. 그리고 잠시 찾아온 정적. 나는 속으로 '아차. 설마 내가 딴생각 하고 있다는걸 눈치 챈건가' 약간은 걱정되는 시선으로 A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A는 내 예상과 달리 불쾌한 기색 하나 없는, 오히려 잔잔하고 다정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A는 바깥의 쌀쌀한 날씨 탓에 굳어 있던 내 어깨를 향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무 내 이야기만 했지? 미안! 재미없는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생이 많다."


그 순간,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그제야 테이블 너머로 내가 뿜어내고 있던 공기가 얼마나 차갑고 날카로웠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굳어진 표정, 성의 없는 짧은 대답, 은연중에 풍기던 날 선 태도. 나는 스스로가 상대방의 피곤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사실 A는 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모든 가시 돋친 눈빛과 숨 막히는 침묵을 도리어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오만한 인내의 이면에는, 나의 모난 태도를 너그럽게 모른 척해준 A의 보이지 않는 참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꽤나 '참을성 있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누군가의 뾰족한 말이나 서투른 행동도 너그럽게 넘길 줄 아는, 관계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돌아보면, 내가 그토록 편안하게 나의 모습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해 준 타인들 덕분이었다.


내가 침묵으로 상대를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도, 상대방 역시 나의 예민함이나 고집, 어쩌면 나조차 모르는 나의 모난 구석들을 묵묵히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완벽하지 않은 나를 참아줘서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나의 인내는 결코 나 혼자만의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서로의 배려라는 푹신한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인간관계에서 참음과 배려는 결코 일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불편한 점을 견뎌내고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 상대방 역시 나의 불완전함을 견디며 나와 공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억누르거나 손해를 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 즉 미묘하고도 아름다운 상호존중의 결과다.


시선을 돌려 다시 공간을 찬찬히 둘러본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공간을 채우는 짙고 따뜻한 커피 향, 서로의 경계를 부드럽게 허무는 낮은 조명과 잔잔한 음악. 이질적인 이 모든 디테일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금씩 양보하며 하나의 완벽한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음과 배려도 이와 같을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도, 요란하게 소리 내지도 않지만, 우리가 머무는 이 공간과 순간 속에 은은하게 녹아들어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상대를 참아내듯, 타인도 나를 참아주고 있다.‘ 그 따뜻한 인내의 교차점 위에서 우리는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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