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을 통해 느끼는 은밀한 기쁨

by 김삼월

스마트폰 화면이 뿜어내는 쨍한 푸른빛이 어두운 방 안을 채운다. 포털 사이트 연예면 메인에 걸린 굵은 헤드라인. 평소 '바른 청년' 이미지로 기부와 선행을 입버릇처럼 말하던 유명 배우의 수백억 대 탈세 의혹 기사다.


기사 아래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수천 개의 댓글들이 있다. 그 사이에는 묘한 활기가 소용돌이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가면을 쓰고 대중을 기만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활자로 정의를 부르짖고 엄격한 도덕을 말한다. 하지만 모니터에 반사된 내 눈빛은 어딘가 기이한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를 스크롤하며 새로고침을 누른다. 평소라면 제목만 훑고 넘겼을 기사를, 오늘은 단어 하나하나를 탐닉하듯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그의 완벽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대중의 비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실시간의 현장을 조금 더 오래, 그리고 자세히 지켜보고 싶어서.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가 꽤나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람인 척해왔다. 세상의 편법을 경멸하며, 오직 나의 정당한 땀과 실력으로만 승부한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내심 잘 나가는 지인들의 SNS를 보며 턱 막히는 열등감을 삼켜야 했던 밤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렇기에 나보다 한참 높은 곳에, 빛나는 무대 위에 있던 누군가가 진흙탕으로 곤두박질칠 때 내 안에서는 아주 질척이고 은밀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거봐, 저 사람도 다 가진 건 아니었네.'

'결국 저렇게 무너질 거였어.'


그의 추락은 나의 통장 잔고를 1원도 늘려주지 않고, 내 현실을 단 한 뼘도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현재 위치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는 사실 자체에서 서늘한 위안을 얻었다. 나를 짓누르던 묘한 박탈감이 일순간 해소되는 듯한 느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이 끈적한 기쁨은 악당들의 거창한 악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타인과 나를 끝없이 저울질하며 어떻게든 내 얄팍한 자존감을 방어하려는 서글픈 생존 본능에서 온다.


나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고백한다. 나는 결코, 완전히 선하지 않다.


인간은 왜 타인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낄까?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촘촘하고 숨 막히는 경쟁 사회가 타인의 실패를 곧 나의 생존 확률 상승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온전히 서지 못하고 상대적 자존감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의 깎여나간 점수와 명예에서 왜곡된 공정성의 위로를 얻고 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타인의 부당한 행운에 분노하는 '정의로운 분노(Nemesis, 네메시스)'와, 타인의 행복 그 자체를 배 아파하는 '시기(Phthonos, 프토노스)'를 엄격히 구분했다. 대의와 정의의 탈을 쓴 채 기사 댓글을 읽으며 느꼈던 나의 안도감은, 실은 그저 얄팍한 시기심의 또 다른 얼굴이었을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내가 아직 타인을 온전한 개인이 아닌, ‘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거울’로만 대하고 있다는 적나라한 증거가 된다. 타인의 추락이 결코 나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정말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샤덴프로이데는 결코 쨍한 햇빛 아래서 당당하게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커튼이 반쯤 내려진 오후 4시의 비스듬한 빛과 같다. 차가운 유리컵 표면에 맺힌 미세한 물방울처럼 조용히 응결되며, 남몰래 입꼬리가 0.3cm 올라가는 그 은밀한 찰나에만 머문다.


세상에 완전히 추하기만 한 감정은 없다. 다만,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겹겹이 숨겨둔,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이 있을 뿐이다.


나는 오늘도 타인의 불행 앞에서 피어오르는 나의 미세한 기쁨을 가만히 관찰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되, 결코 거기에 머물지는 않기로 한다.


나도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는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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