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건 아니고, 무해한 건 맞습니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

by 김삼월


“너 너무 착한거 아니야? 나는 너가 가끔은 이기적으로 행동해야한다고 봐.”


누군가 무심코 던진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 묘한 부담감이 내려앉았다. 나는 사실 꽤나 자주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착하다’는 말은 사실 칭찬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입을 통해 규정된 나의 ‘착함’은 나에게 곧 안도감보다는 서늘한 구속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갈등을 피하고, 양보하며, 나의 욕구보다 당신의 편의를 우선시해 달라는 무언의 청구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소로 화답하는 겉모습 뒤에서, 내 안의 무언가가 소리 없이 숨을 죽인다.


‘사실 착한 건 아니고, 무해한 건데..’


나는 사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진짜다. 내가 아무리 윤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난 정말 ‘착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착함’은 종종 용기의 반대말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부당함에 맞설 용기가 없어 침묵을 택하고, 거절할 용기가 없어 타인의 무리한 요구에 순응하며,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 내면에 피어오르는 뾰족한 진심을 삼키는 것. 이것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착함’의 본질인 것이다.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무기력한 타협을 ‘선함’이라 포장할 때,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러한 태도의 기저를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고 쟁취할 힘이 없는 약자들이 자신의 무기력과 굴종을 ‘인내’와 ‘선함’이라는 덕목으로 포장한다고 비판했다. 니체는 이것을 이른바 ‘노예 도덕’이라고 정의하였다. ‘노예 도덕’은 타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길들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여기에서는 강자를 ‘악’으로, 약자를 ‘선’으로 분류하는 잘못된 오류를 범한다. 사실 ‘순종’과 ‘인내’ 그 자체는 선함이 아니고, 힘이 약한. 즉 ‘노예’들이 ‘주인(혹은 강자)’을 향하여 펼치는 ‘상상적 복수’의 산물인 것이다.


반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진정한 도덕적 행위’란 타인의 시선, 칭찬에 대한 기대,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세운 보편적 원칙에 자율적으로 따를 때 비로소 성립한다고 말했다. 즉 외부의 원인이 아닌, 내적 판단에 의한 자기 일치적 행위가 ‘선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무조건 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태도와 반대된다. 이는 오히려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 행동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지금 내가 행하는 이 ‘선함’은 과연 자율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그저 무리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는 얄팍한 인정 욕망의 산물인가?”


질문의 끝에서 마주하는 진실은 꽤나 따갑다. 우리는 진정 선하기 위해 선한가, 아니면 그저 미움받지 않기 위해 선한가? 결국 타인의 기대라는 안전망 속으로 도피하기 위해 나의 고유한 목소리를 지우는 행위는 타인을 향한 배려가 아니라 지독한 자기방어에 불과하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는 결국,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것과 같다.


타인에게 착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내 삶의 ‘주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짜 윤리는 타인의 기대에 부드럽게 순응하는 매끄러운 표면 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는 타인과 부딪히고, 기대를 배반하며, 기꺼이 오해와 미움을 감수하겠다는 서늘한 각오 위에서만 탄생한다. 타인이 내린 '착한 사람'이라는 트로피를 기꺼이 반납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다운 사람’이라는 진짜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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