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견뎌낸 자아는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다
금요일 밤, 창밖으로는 들뜬 주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렁인다. 하지만 창을 닫고 암막 커튼을 치는 순간, 방 안은 마치 심해처럼 깊은 정적에 잠긴다. 하루 종일 시야를 어지럽히던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습관처럼 틀어두던 넷플릭스마저 종료한다. 세상에서 완전히 로그아웃하는 이 순간, 비로소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 공간에는 나를 지켜보는 타인도 없고, 트렌드에 뒤처질까 전전긍긍하는 조바심도 없다. 오직 내가 온전히 사랑하는 것들과 나 자신만이 남겨질 뿐이다. 흔히들 혼자 있는 상태를 ‘외로움’이라 부르며 연민의 눈빛을 보내지만, 이 순간의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타인의 목소리가 소거된 이 고요한 밀도 속에서, 나의 진짜 감각은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다.
다음 날 오후 성수동의 어느 핫한 카페. 높은 층고와 노출 콘크리트, 미니멀한 가구들로 채워진 공간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의 동선이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비슷한 각도에서 커피와 인테리어를 앵글에 담고, 어딘가에서 본 듯한 비슷한 해시태그와 감상평을 실시간으로 SNS에 업로드한다. '나만의 취향'을 소비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곳에 전시된 것은 '트렌드에 편승했다는 안도감'에 가깝겠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진열장 위에 올려둔 취향은 화려하고 매끈해 보인다. 그렇지만 정작 그 이면에 '나'라는 주체의 치열한 고민은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 정해놓은 '좋은 취향'의 궤도를 맹목적으로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획일화된 무리 속에서 나의 고유함은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다.
자아를 대면하는 용기, 고독(Solitude)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밀려왔던 그 서늘한 공허함의 정체는 바로 ‘나 자신의 부재’일 것이다. 진정한 취향은 타인의 시선이 교차하는 번화가나, 알고리즘이 쉴 새 없이 새로고침되는 화면 속에서 결코 뿌리내리지 못한다. 취향이 싹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일 때, 우리의 자아와 마주칠 용기를 얻는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혼자 있는 상태를 두 가지로 엄격하게 구분했다. 하나는 ‘외로움(Loneliness)’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Solitude)’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외로움은 타인과 단절되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듯한 고통스러운 결핍의 상태를 말한다. 반면, 고독은 겉보기엔 혼자일지라도 내면은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가장 친밀한 타자와 마주 앉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아렌트는 이를 ‘하나 안의 둘(two-in-on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이 내면의 대화야말로 모든 사유(思惟)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취향을 형성하는 과정은 이 아렌트적 의미의 ‘사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진정한 취향은 "이것이 정말 내 마음을 움직이는가?", "나는 왜 이것에 끌리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치열한 내면의 대화를 통해 완성된다. 타인의 평가나 사회적 기준이라는 거대한 잣대를 잠시 뒤로하고, 오직 나와 대상만이 독대하는 그 고요한 밀도 속에서 비로소 ‘나만의 호불호’라는 뼈대가 세워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고독의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왜냐하면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아는 것을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자꾸만 의식 위로 튀어오른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 속으로 끊임없이 도피한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일찍이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인간이 사교와 군중 속으로 끊임없이 도피하려는 이유를 "자기 자신을 견뎌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못박았다. 내면이 텅 비어 있는 사람일수록, 홀로 남겨졌을 때 마주해야 하는 자신의 빈곤함을 견디지 못해 외부의 자극과 타인의 무리 속으로 필사적으로 숨어든다는 것이다.
핫플레이스에 모여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취향을 소비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군중 속으로의 도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확고하고 단단한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고독을 감내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고독의 시간이 깊어질수록, 즉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의 밀도가 촘촘해질수록 우리의 취향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결국 '어떤 취향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은, '당신은 당신 스스로와 얼마나 깊고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단해진 자아는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고독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우리의 취향은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유행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서도 쉽게 휩쓸리지 않는 견고함을 얻게 된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감각의 해상도를 높이고 내면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여 본 사람만이,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얕은 취향의 전시장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취향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 마침내 윤리학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취향은 단순히 '무엇을 소비하고 소유하는가'를 보여주는 화려한 라벨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나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가', 즉 자기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고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가를 증명하는 투명한 거울이자 윤리적 지표다. 내면의 고독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아 본 사람,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긍정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낸 사람의 자아는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향한 다정한 존중으로 확장된다. 자기 자신과 깊고 고요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독이 지닌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의 취향이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서 함부로 평가하거나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낯설고 투박한 취향 이면에 자리한, 치열하고도 밀도 높은 고독의 시간을 감히 짐작할 줄 아는 까닭이다.
그러니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볼 차례다. 남들이 다 아는 것을 나만 모를까 봐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군중 속으로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의 가벼운 인정과 전시를 위해, 정작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만의 깊고 단단한 취향을 기르기 위해, 당신은 오늘 기꺼이 혼자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소란스러운 세상의 스위치를 끄고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그 고요한 정적의 시간, 고독의 밀도가 짙어지는 바로 그곳에서 비로소 진짜 나의 윤곽이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