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에 대하여

by 김산난



25.09.06 10:59

어제는 취미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는데

오늘은 조금 더 들어간 필사에 대하여.



‘필사’



멋진 말로 표현이 되어있을까 하여 찾아봤는데

너무나 직관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맞다. 베끼어 쓰는 것이다.



누구는 부처의 말을, 누군가는 성경을 필사한다.

방금 찾아보니 헌법을 필사하는 책도 있고,

시집이나 책 한 권을 통째로 필사하는 것도 있군.



나는 막 갖춰놓고 “땅! 시작!” 하면

오히려 어정쩡한 결과가 이어져서

예전에 선물 받은 다이어리 한편을 곧장 열어

그날 읽은 *혹은 읽었던 책 구절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시작한 필사는 사실,

잔뜩 쌓아놓은 책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선독서 후구매를 하는 나로서는

그간 열심히 수집해온 책을 버린다는 게 속상했고,

책 속의 줄 그어둔 문장들을 언제든지 꺼내 읽으며

내 머리에 각인시켜야 하는데

앞으로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에 머리를 좀 굴려봤다.



그 방도가 필사이다.

책을 팔기 전, 다시 펼쳐 훑고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을 내 필체로 옮겨 심는다.



욕심이 날 때엔 네 구절이나 적은 날도 있는데,

그 후론 의도적으로 많이 쓰는 것은 자제하고 있다.

팍 끓으면 팍 식으니까.



이렇게 책을 골고루 필사하다 보면

다이어리에 나만의 책 한 권을 완성하는 기분이 든다.

다른 책에서 베끼었지만

옮겨 심은 문장들을 차례로 읽다 보면

내가 추구하는, 갈망하는 문장들의 결이 보인다.



그리고 그게 참 재밌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일부를 촬영하며

문장을 수집할 때에는 흐릿하던 나의 철학들이

요즘은 아주, 아주아주 또렷하게 보이고 있다.



이 또한, 내가 나와 친해지는 과정.

그리고 너무 낭만적인, 낙천적인? 문장들을 만날 때

‘아 이렇게 살아가는 게 실제로 가능한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닐까?’

‘이 사람만 이렇게 사는 걸 거야.’

라는 의심이 피어오르곤 했는데



요즘 필사를 하며 드는 생각은

생각보다 세상의 다수가

그 뜬구름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얻는다.

그래 뜬구름 좀 잡으며 살아보기로.



나는 매일매일 나만의 낭만을 옮겨심고 있다.

베끼는 모든 문장이 모든 곳에 각인되어

결국 그렇게 살아지길 바라면서.



오늘의 마무리는

나의 필사들입니다.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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