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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Dec 26. 2016

[김 사원 #13] 연차라도 알뜰히 챙겨 쉬려 했는데

어느덧 12월, 연차 휴가는 두 개가 남아있었다. 회사가 월급을 넉넉히 주나 복지가 있나 그러니 연차 휴가라도 알뜰히 챙겨 먹어야겠다고 연말을 맞아 김 사원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 와중에 상사 눈치를 보느라 휴가를 다 못쓰는 직원이 여럿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직원은 이제 휴가라는 개념 자체를 잊은 듯했다. 본부장은 자기가 올해에 휴가를 얼마나 조금 썼는지 자랑스레 말했다.(휴가서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근무 시간에 개인 볼일을 볼 수 있고, 오후에 일찍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이 회사는 품의서 상신에는 전자 결재를 사용하지만, 왜인지 휴가서는 결재판에 끼워 업무대행자와 팀장과 본부장을 찾아다니며 사인을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운이 없다면, 휴가를 못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과 휴가를 안 쓰는 게 자랑인 사람에게 차례로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홍 팀장과 이 차장과 김 사원 셋이서 꾸려오던 기획팀에 인력 변동이 있었다. 홍 팀장이 불쑥 그만둔 뒤 이 차장이 팀장을 맡았고 과장급 팀원을 구하는 중이었다. 팀원이 한 명 부족한 상황에 굳이 남은 휴가를 쓴다고 눈치를 줄지도 모르지만, 눈치를 줄 수록 더 어떻게든 휴가를 써야겠다고 김 사원은 마음먹었다.


"김 사원, 요즘 힘든 일은 없어?"

간단히 업무 회의를 마친 뒤 이 팀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현재 팀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 혹시 김 사원에게 애로사항은 없는지 팀장으로서 묻는 것 같았다.

"본부장이요."

김 사원이 농담처럼 대답했다. 마침  한 고객사와 재계약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김 사원의 일이 크게 늘지는 않았다. 팀원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일 때문에 토로할 점은 없었다. 힘든 건 항상 일보다 사람이었다.


이 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기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 이야기를 했다. 이상하게 자신의 일에 꼬투리 잡으며 괴롭히던 상사가 있었다고 했다. '너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다. 나는 더한 일도 겪었다'는 말인가 싶어 처음엔 경계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야기는 이 팀장과 닮아 있었다.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는 이 팀장의 성격처럼 좀처럼 의도가 짐작되지 않으나 가만히 듣게 되는 이야기였다.


'못된 상사 밑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을까. 큰 소리로 대들어 본 적도 있을까. 그래서 도망치듯 회사를 관뒀을까. 그 상사는 왜 그랬을까'

직접 묻지는 못했으나 회의실에서 나와서도 한동안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다 휴가때문에 악착같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결국 연차 한 개는 끝내 쓰지 못했다. 이 팀장에게 업무 대행을 이틀씩 부탁하기가 왠지 불편했다. 업무 대행이래봤자 전화를 받아주는 일 정도인데.


김 사원은 자기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차 하루이틀에 아득바득거리던 마음도 우스웠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에 누그러지는 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아군은 없는 회사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기대는 곳은,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은 결국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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