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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Feb 19. 2018

[김 사원#24] 봄날은 왔다. 연봉 계약서와 함께

김 사원에게 이 얘기를 들은 누군가는 '다른 직원들이 김 사원 덕분에 후련했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막내 사원 때문에 이사와 팀장이 불려 간 상황이니, 사무실 공기가 김 사원에게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김 사원은 이 이야기를 농담처럼 꺼낼("제가 미쳤었나 봐요") 어느 봄날을 상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김 사원은 요즘 휴대폰을 쓰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한마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건 제 폰인데요?"


-[김 사원 #08] 사장님, 카톡이 그렇게 좋으세요 中(링크)


봄날은 왔다. 연봉 계약서와 함께. 그해 연봉계약서에는 을의 의무가 하나 추가되었다. 

'통신 기술 발달에 따라 회사에서 업무 목적으로 이용하는 카카오톡 외 불특정 SNS 통신 업무 체계를 반드시 이용 및 답신, 소통하지 않는 경우 이로 인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한다.'


황 이사는 김 사원에게 A4 용지를 내밀며 올해 연봉은 3% 인상이라고 설명했다. 연봉란에 적힌 숫자는 십원 단위까지 있어 꽤 어지러웠다. 김 사원은 복잡한 숫자를  가만히 보았다. 달리 의도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는데 황 이사는 침묵이 어색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지고 가서 보고 사인해서 가져와도 돼"


그렇게 종이를 들고 나와 자리에 앉아 찬찬히 읽어보다 새로운 을의 의무를 읽게 된 것이다. 달라진 게 없어서 바로 사인하고 나왔다는 옆자리 이 과장의 말에 김 사원이 대꾸했다.

"을의 의무가 늘어났던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 과장의 표정을 보며 김 사원은 자신의 계약서에만 있는 항목인가 잠시 생각했다. 



김 사원은 계산기를 열어 현재 연봉에 0.03을 곱해보았다. 여섯 자리의 어지러운 숫자가 나왔다. 지난 1년 동안의 성과와 성장에 대한 보상치고는 적었고, 1년 동안 불특정 SNS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모든 불이익을 감당하는 대가라기에는 모호했다.(무려 '불특정'에 '모든 불이익'인데!) 


연봉계약서를 서랍에 넣고 닫았다. 다음날 황 이사가 김 사원을 방으로 부르자 김 사원은 새로운 을의 의무에 대해 물었다. 황 이사는 사장님도 지난번 일로 화가 나서 적은 거라며 신경 쓸 것 없다고 우물거렸다. 김 사원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왔다. 


을의 의무 중 유일하게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의 지침이 적힌 항목이었다. 이런 문구 하나가 정말 공식 효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이런 문구에 김 사원을 겁을 집어먹을 거라 생각한 걸까. 이런 사람들이 상사고 사장이라는 현실이 갑갑하고, 이런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 처지가 답답했다.  


그다음 날까지도 연봉 계약서를 내지 않자 이번에는 관리부 이 사원이 재촉을 해왔다. 서랍 속 계약서를 꺼냈다. 서랍을 닫을 때 종이가 밀렸는지 계약서가 구깃했다. 


구깃한 종이를 손바닥으로 펴며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러니까 이건 제 폰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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