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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Apr 05. 2018

[김 사원 #25] 회의는 업무가 아닌가요?

"내일부터 매일 6시에 일일 회의를 할 겁니다. 6시에 회의를 하는 이유는 업무 시간에 회의를 하면 업무에 방해가 돼서 그렇습니다. 업무시간에는 각자 할 일을 하시면 됩니다. 이상!"

박 이사는 자기가 단호하게 말하면 근엄해 보일 거라 착각하는 듯하다. 직원들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까닭은 박 이사의 기에 눌려서가 아니다. 김 사원도 이제 안다. 박 이사와는 말의 논리를 다툴 수 없다. 말로 따져볼 수 없다면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회사 근처에 영어학원이 어디 있더라. 6시 이후에 가장 빨리 시작하는 강의를 끊어야지. 그리고 학원에 가야 한다며 6시 땡 하면 나가야지.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자.

‘업무시간에 영어학원을 다니면 업무에 방해가 되잖아요. 업무시간에 할 일은 다 마쳤으니 퇴근 후에는 저도 자기계발을 해야죠. 직원의 자기계발은 회사에도 좋은 일 아닌가요?’

유치한 구석이 있는 박 이사는 수강증을 보여달라 할지도 모른다. 퇴근 후에 하는 일까지 회사에 증명해야 하냐며 한두 번 버텨야지. 박 이사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강증을 내밀어야지. 이번엔 감정적인 구석까지 있는 박 이사가 일일회의를 아침 8시로 옮기자고 할 수도 있다. 그때는 뭐 늦게 일어났다고 평소처럼 9시에 출근하면 되지.


근처에 고용노동부 지청이 어디 있더라. 작년에 근처 회사로 이직한 동료에게 들었는데, 그 회사는 매출 하락을 이유로 전 직원을 월요일마다 한 시간씩 일찍 출근시켰다고 한다. 한 달쯤 지나서 고용노동부에서 회사로 전화가 왔단다. 어느 직원이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회사는 즉시 월요일 조기출근을 없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출퇴근길에 보던 고용노동부 지청 간판이 달리 보였다. 직장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긴 하는구나, 공무원의 전화 한 통은 힘이 있구나.


굳이 근처에 있는 고용노동부 지청을 찾을 필요는 없다. 전화 상담도 가능하다. 물론 전화할 일이 없길 바라지만.


스마트폰에 잡코리아 어플이 어디 있더라. 그냥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게 낫겠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는 박 이사도 싫고, 그에 대응하느라 힘을 쏟기도 싫다. 대응해봤자 유난 떤다는 소리나 들을 텐데. 게다가 월급은 또 얼마나 적은가. 그런데 말이야. 다른 회사에도 박 이사 같은 사람이 또 있으면 어떡하지? 이 회사를 그만둔 걸 후회하게 될까. 에이 설마. 어쩌면 흐지부지한 구석이 있는 박 이사는 몇 달이면 아니 며칠이면 일일 회의 같은 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눈 딱 감고 조금 더 견뎌야 하나.


예상한 대로 6시 일일 회의는 유야무야 되었다. 하루는 박 이사가 입주자 모임에 가느라, 또 하루는 박 이사가 중요한 저녁 예배에 가느라, 또 하루는 팀장이 외근을 나가서 하루하루 취소되다 보니 아무도 일일회의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김 사원의 마음은 유야무야 풀어지지 않았다. 박 이사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지 못하는 한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게 뻔했다. 박 이사는 저녁 약속보다 업무가 먼저라고, 그게 책임감이라고 말해왔겠지. 그렇지만 자신의 입주자 모임과 저녁 예배는 별개였을 테고. 자신이 뱉은 말이 연기처럼 사라져도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겠지. 저런 사람이 상사고 임원이라니.


구역질이 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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