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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Apr 09. 2018

[김 사원 #26]  제 이직 사유를 들어보시겠어요

"왜 회사를 옮기려는 거죠?"

면접관의 질문에 김 사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원래 3년을 채우면 이직할 생각이었어요. 그때가 이직하기 제일 좋은 시기라고 하잖아요. 지금이 2년 9개월 차예요. 왜 계획보다 빨라졌냐고요?


몇 달 전에 공 과장이라고 저희 팀에 새로 들어왔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구조라 과장이 새로 들어왔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공 과장은 저와 둘이 있는 틈만 나면 자기가 예전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수십 개나 했고, 언젠가 다 전수해주겠다, 지금은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이 사람, 요란한 빈수레 유형이구나 직감했죠.



한 달쯤 지났을 때인가요? 프로젝트를 수십 개나 했다는 공 과장이 업계 기본 용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요. 제가 '그 부분은 라디오 버튼이다'라고 말하면 잠시 멈칫하다 '그럼 이 버튼을 클릭하면 서버를 통해 데이터가 전달돼서 회원 정보와 유닛되는 거군'하는 식이었어요. 꼭 전문 용어를 섞어서 답하는데 맥락을 벗어날뿐더러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되었죠.


언젠가는 이사님이 우리 팀에 어떤 일을 지시했는데 공 과장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더라고요. 늘 하는 일이라 어려울 건 없었어요.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어요. 탕비실에 가는 저를 쫓아오더니 '저번에 이사님이 시킨 일은 내가 거의 다 했는데 마무리할 시간이 없다. 메인 페이지 어디에 추가할지 정한 다음에 관리자 메뉴 하나만 만들면 되니 김 사원이 해달라'라는 거예요. '메인 페이지 어디에 추가할지 정하고 관리자 메뉴 하나 만드는 것'이 그 일의 알파와 오메가인데 대체 뭘 다 했다는 건지. 끝나도 진작 끝났어야 하는 시점에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가 싶었죠. 다행히 제가 하던 일이 더 급해서 떠맡지는 않았어요.


급기야 제가 예전에 썼던 기획서를 달라고 하더군요. '보고 쓰겠다'라고 당당히 말하더라니깐요. 조금 기가 찼지만 줬어요. 기획서 줬다가 성과 뺏기고 승진 누락되는 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죠. 공 과장이 제 기획서 본다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어요. 역시나 제 기획서에서 고객사 이름만 바꿔서 끝내더라고요. 양식도 그대로라 누가 봐도 '김 사원 표'였어요. 고객사 이름만 바꿔도 크게 무리가 없었어요. 물론 구체적인 부분은 조금 안 맞았지만요. 이렇게 쉽게 일하는 방법이 있구나 깨달았죠.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함께 했던 과장, 차장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과거에 굵직한 프로젝트를 한두 번씩은 경험했고 그 경험이 현재 업무에 녹아있었어요. 때로는 작은 회사에 다니는 자신을 자조하기도 했지만 또 은근히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었고요. 최소한 자기가 맡은 일은 자기가 하는 사람들이었죠.


사무실을 둘러보니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더라고요. 여기에 있다가는 저 요란한 빈수레를 내가 끌겠구나 싶었어요. 어차피 조만간 이직할 계획이었는데 조금 서두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한 거죠.


라는 사연을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분위기와 업무에 많이 적응했으니, 계속 다니면 분명 편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제 시기는 현재에 안주하기보다는 다양한 환경을 접하면서 업무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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