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팀장님, 회의실에서 잠깐 봬요' '팀장님, 차 한 잔 하실래요? ... 하실까요?'
옆 옆에 앉아 있는 이 팀장에게 회의실 가서 잠깐 얘기를 하자고 말을 걸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잘못한 일이 있지도, 이 팀장이 어려운 사람이어서도, 절대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김 사원은 어제 K사 최종 면접 합격 연락을 받았다. 합격의 반가움을 느낄 여유도 없이 결정과 선택의 순간들이 연이어 밀려왔다. 처음은 연봉협상이었다. K사가 무작정 연봉을 깎으려 해서 입사를 포기할 뻔하기도 했다. 겨우 만족스러운 수준의 연봉으로 협의하고 입사일까지 정한 뒤에는 '혹시나'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혹시나 지금 회사에 있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혹시나 다른데 이력서를 넣는 게 낫지 않을까, 혹시나 K사가 나와 맞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다독여 K사에 입사하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는 퇴사 절차를 떠올렸다. 인수인계 기간은 얼마가 적당할까, 지금 회사에서 트집을 잡으며 퇴사를 방해하진 않을까, 남은 연차를 소진할 수 있을까, 이직 전에 일주일 정도는 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퇴직금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받을까 하는 생각까지 앞뒤 없이 피어올랐다.
이 팀장은 녹차 티백이 담긴 머그컵을 들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먼저 말을 건네진 않았다. 이 팀장이 자리에 앉자 김 사원은 말을 꺼냈다.
"저 퇴사하려고요."
이 팀장은 입에 가져다 대던 머그컵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김 사원은 이 팀장에게 휴지라도 뽑아줘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이내 이 팀장은 김 사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어느 회사인지, 어떤 직무인지 같은 질문을 몇 가지 하더니 슬쩍 웃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처음으로 차 마시자고 하더니 이런 얘기 하는 거야?"
"차 마실 일 없는 게 서로 좋은 거죠"
김 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팀장의 웃음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김 사원은 회의실에서 나와 곧장 황 이사 방으로 들어갔다.
퇴사하겠다는 김 사원의 말에 황 이사도 입 데인 몸짓을 했다. 그리고 턱에 묻은 물기를 휴지로 닦으며 왜 그만두는지, 어디로 가는지, 거기서 뭘 하는지를 순서대로 물었다. 질문과 대답이 끝나자 이번엔 인터넷에 K사를 검색하고는 여기보다 직원 수가 얼마나 더 많은지, 매출이 얼마나 더 잘 나오는지, 자본금은 얼마나 더 있는지 읊었다. 그리고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연봉은? 100만 원쯤 올렸어?"
"아니요."
김 사원이 연봉을 얘기해주자 황 이사는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박 이사와 이 팀장을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사업 보고라도 하듯 김 사원이 어느 회사에 가는지, 그 회사가 얼마나 큰 곳인지, 연봉을 얼마 받고 가는지를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런 뒤에야 현실적인 안건이 올랐다.
"그래서 김 사원 언제까지 출근할 수 있어?"
입사 예정일은 3주 후였으나 2주 후라고 말했다. 김 사원의 대답을 듣고 박 이사가 입을 삐죽거렸다.
"원래 인수인계는 4주는 해야 돼"
황 이사가 급히 박 이사의 말을 끊었다. 황 이사는 박 이사가 뾰로통한 반응을 보일 줄 예상한 모양이었다. 퇴사를 앞둔 김 사원이 그에 맞서 이판사판 목소리를 높일까 염려했던 것 같다. 김 사원은 목소리를 높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퇴사하길 잘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들었다. 자신이 이 회사에 입사할 때가 생각나기는 했다. '다니던 회사는 어차피 떠날 곳이니 신경 쓸 것 없다. 하루빨리 정리하고 여기로 출근하라'는 독촉 전화를 해댔던 이가 누구였더라.
박 이사가 몇 번 더 구시렁거리었지만 퇴사일은 김 사원이 원하던 대로 2주 뒤로 결정되었고, 인수인계서를 최대한 자세하게 작성하라는 당부를 끝으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를 다니다 다른 회사로 가는 것이 이직이라면 김 사원도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나 경력을 쌓아 옮겨가는 이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력서를 돌리고 몰래 면접을 보러 다닐 때는 합격하기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합격을 하고 보니 그때부터 또 다른 시작이었다. 연봉협상, 퇴사 결심, 퇴사 통보, 사직서, 인수인계, 남은 연차, 회식, 퇴직금, 기대와 불안을 다스리는 시간까지. 별 일 아닌 줄 알았지만 막상 닥쳐보니 마음이 쓰이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잡코리아 설문조사에 의하면 30대와 40대 직장인들의 이직 경험은 3~4회라고 한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이니 김 사원 역시 앞으로 몇 번을 더 이직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씩 조금씩 헤쳐나가는 수밖에.
이제 경리부 정 사원에게 가서 사직서 양식을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