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 사원 Apr 24. 2018

[김 사원 #34] 근로자의 날 쟁취기

"이번 근로자의 날에 김 사원은 대표전화 돌려놓고 가"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 날이 낀 징검다리 휴일을 며칠 앞둔 어느 회의 시간이었다. 박 이사가 뜬금없이 이용자들의 문의를 받는 대표전화를 근로자의 날에 김 사원의 휴대전화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했다. 김 사원이 주로 대표전화를 받았으나 김 사원만의 업무는 아니었고, 그동안 근로자의 날은 물론이고 주말이나 휴일에 전화를 돌려놓은 적도 없어서 의아했다.


왜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삼켰다. 그냥 피하자. 김 사원이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날 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밖에 있습니다."
"집에 있으라는 게 아니야. 일 보면서 그냥 전화 오면 받아. 그리고 요즘 전화 별로 안 오잖아?"

"밖에서 전화받아봤자 처리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오늘은 휴일이니까 처리해줄 수 없으니 다음에 전화하라고 말해줘."

ARS 흉내를 내면 되나. '오.늘.은.근.로.자.의.날.휴.무.이.므.로.문.의.에.답.해.드.릴.수.없.습.니.다.이.틀.뒤.월.요.일.에.전.화.주.시.기.바.랍.니.다.'

"그러시면 제가 근로자의 날에 출근해서 전화받고 대신 다른 날에 쉴게요."

"그건 안 돼"

"... 저도 안 돼요"


회의가 어정쩡하게 끝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박 이사는 자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의 지시가 거부당한다는 것은 털끝만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박 이사의 머릿속에 있는 김 사원은 근로자의 날에 집에 가만히 있을 사람이었을 테지. 김 사원은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박 이사가 한 가지는 제대로 짚었다. 김 사원은 근로자의 날에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생각이었다. 일단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TV도 보고 책도 보며 뒹굴뒹굴 여유로운 휴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침 9시부터 전화가 울려 꿀 같은 늦잠을 방해받는다면,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뜨끔 거리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주휴일을 제외하면 근로자의 날은 민간기업 직원에게 유일한 법정 휴일이다. 일요일을 포함한 설날, 어린이날, 추석 등 달력에 빨갛게 표시되는 공휴일은 관공서의 휴일, 즉 공무원이 쉬는 날로 법에서 정하고 있다. 민간기업이 '빨간 날'에 근로자들을 쉬게 할 의무는 없다. 민간 기업 직원인데  빨간 날에 꼬박꼬박 쉬고 있다면? 일요일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주휴일이고, 공휴일은 회사 내부 규정에서 쉬는 날로 정한 것이리라. 일부 민간 기업은 공휴일에 쉴 때마다 연차휴가를 제한다. 김 사원의 회사도 그런 이유로 매년 연차 서너 개를 뺐다. 그러니 근로자의 날 만큼은 당당하게 누리고 싶었다.


2018년 2월에 통과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을 민간기업에도 적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개정안은 2021년 7월 1일까지 단계적으로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


박 이사는 근로자의 날에 가족 나들이를 간다고 했다. 그래, 박 이사도 근로자였지. 김 사원은 묻고 싶었다. 전화를 받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렇게 중요하지만 '그냥' 받으면 되는 일이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말은 왜 하지 않는지. 그 일이 김 사원의 일이기 때문이라면 사업부의 인력과 시스템을 총괄한다던 자신의 일은 쉬어도 되는 것인지.


잠시 후 황 이사가 김 사원을 불렀다.

"회의 시간에 박 이사가 시킨 거 안 한다고 했어?"

"박 이사님이 근로자의 날에 대표전화를 돌려놓고 가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날 하루 종일 밖에 있다고 하니, 밖에서 볼 일 보면서 전화받으라고 하시네요. 요즘 문의전화도 별로 없다고요. 그런데 그날 전화가 한 통이 올지 열 통이 올진 모르잖아요. 게다가 문의 사항을 처리해주라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휴일이니 처리를 해줄 수 없고 평일에 전화하라'라고 안내를 하래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차라리 제가 그날 출근을 하고, 다른 날에 대체 휴무로 쉬겠다고 하니 그것도 안된다고 하시네요."

"왜 안 돼? 그렇게 해"

"네"

 황 이사도 그냥 피하자는 마음이었는지, 덕분에 간단하게 결론이 낫다.


근로자의 날은 아주 화창했다. 가족과 나들이를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출근하는 김 사원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오늘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그냥 전화를 받으면 되고, 내일은 대체휴무로 쉴 수 있어 마음이 편한 덕분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나들이를 간 박 이사도, 시골집에 내려간 홍 팀장도, 제주도를 간 이 차장도 편안한 휴일을 보내고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고, 우리 모두가 근로자 아닌가.


#해피메이데이


* 뉴스 화면 출처 : '주 52시간 근무제' 상임위 통과…특례 업종도 줄여(2018-02-27, JTBC 뉴스룸,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596211)

매거진의 이전글 [김 사원 #33] 진통제 같은 금요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