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 사원 Aug 29. 2018

[김 사원 #37] 회사를 위한 일이니 반드시 하세요

황 이사가 지갑에서 이 만원을 꺼내 주며 말한다. 

"몇 달 지나면 잠잠해질 테니 이걸로 내"

김 사원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돈을 받아 이사 방을 나온다. 


황 이사가 김 사원에게 돈을 준 이유는 어느 재단 기부금 때문이었다. 시작은 사장이 그 재단의 이사가 되면서였다. 재단 이사장이 장관 출신인 데다 여러 기업과 연이 있다고 했다. 사장은 이사장과 친분을 쌓아서 기업에 영업을 들어갈 생각인 듯했다. 그래서 재단 이사도 맡고 재단 웹사이트도 새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해보니 직원들 책상마다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재단 기부금 자동이체 신청서였다. 박 이사는 '회사 발전을 위한 것이다. 매월 삼 천원이 아까울 수 있지만 회사 차원에서 하는 일이니 다들 신청서를 작성해서 오늘까지 내라'고 말했다.


김 사원은 내 통장에서 돈이 나가는데 그게 개인 차원이지 왜 회사 차원인가 생각하며,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은행에 가서 새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신청서에 새 통장의 계좌번호를 적어냈다. 잔고가 없는 통장이니 기부금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김 사원의 기부금이 연체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디어 황 이사 귀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 만원을 받고 나오면서 '매월 삼천 원씩 출금되는데 남은 이천 원을 돌려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은행에 내려가 얼마 전 만든 새 통장에 이 만원을 입금했다. 



그렇게 육 개월은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번엔 책상 위에 종이가 세 장씩 놓여있었다. 직원 한 명당 후원자 세 명을 모아 오라는 것이었다. 박 이사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기부금 강요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돌려 말할 법도 한데 '회사를 위해 '반드시' 하라'고 당당히 말했다. 체념한 듯 신청서 세 장을 얼른 작성해 제출한 사람도 있었다. 아마 가족 이름을 썼겠지. 


김 사원은 신청서에 아무 이름이나 썼다. 그리고 자기 계좌번호 중 두세 자리를 빼서 잘못된 계좌번호를 만들어 적어냈다. 계좌번호가 잘못됐다고 연락이 올 수도 있지만 지인에게 받은 그대로 냈을 뿐이라고, 지금은 연락이 안 된다고 할 생각이었다. 이번엔 6만 원을 받게 되면 어쩌나.


경리부 정 사원에게 신청서 세 장을 건네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나 붙잡고 좀 묻고 싶었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우리가 언제는 회사를 위하지 않은 일이라도 했는지. 장관 출신이라는 높으신 분은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알기나 하시는지, 재단 곳간을 채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신지도 묻고 싶었다.


권한과 책임과 권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두 달 지나면 신청서 다섯 장이 책상 위에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 사원 #36] 과장님, 싸구려 훈계는 이제 그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