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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Jul 15. 2018

일과 공부, 인생을 놀이처럼

우리는 왜 일하는가,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마라 감상문

나는 왜 그동안 스스로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해 왔을까? 그래서 어떤 치열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격정적으로 고민하도록 강요해왔을까? 이것은 모두 자기소개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취업을 하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자기소개서. 정말 쓸말이 없었다.


나에게 대학생활은 축제였다.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공연과 축제 연출을 했다. 지금 연세대학교에서 매년 마다 진행하는 연고제라는 행사가 절친한 선배와 내가 2007년에 최초로 연출했던 축제였다. 그 절친한 선배가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겠다고 해서 선거를 돕느라 찜질방에서 홍보물을 만드려고 밤을 새기도 했다.


고등학교, 재수 생활에 이어 대학에 갔을 때 나는 거의 고삐가 풀린 망아지였다. 1학년 성적이 2점대에 머물렀다. 그래도 공부해보고 싶었던 신문방송학을 재미있게 공부했다. 영화의 역사, 방송의 이해, 영상 제작 실습 등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수업이 너무나 많았다. 본 전공은 사학이었지만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면서 좋은 형도 만났다.


실연의 상처를 딛고 4학년에는 문화탐방으로 홍콩, 상하이를 다녀왔다. 리더십 학교에서 1년간 리더십 교육을 받았다. 필드스터디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다녀왔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학교 친구였던 아내를 다시 리더십학교에서 만났다.) 즐겁고 재미있게 연애했다.


이렇게 재미있게 놀다보니 군대 갈 타이밍을 놓쳤고 장교로 군대를 갔다. 운이 좋게 나와 적성이 맞는 정훈장교가 되었다. 장교로서 모범이 되거나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다. 그저 지금의 아내와 즐겁게 데이트 하다가 3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전역이 다가오자 나는 자기소개서라는 영수증을 받았다.


대학생활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고, 하루하루가 축제였다. 장교 시절도 나름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소개서에 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혼을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취직을 해야 했고,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데, 누구는 공모전을, 누구는 자격증을 따야만 조금 더 안정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시대라고는 상상을 못한 것이다. 나는 그저 그냥 잘 살아내기만 하면 뭔가가 될 줄만 알았다. 그 때 나의 꿈은 PD나 공연연출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저 잘 놀고 잘 지내면 될 줄만 알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고등학교 3년을 그냥 잘 보내고 나면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재수를 했다. 그 때 나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었나보다. 정말 나는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에 나오는 자아처럼 당시 세상을 몰랐다. 세상을 모른 뒷감당을 해야 했다. 사회라는 망망대해에 출항해야 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니 전혀 정비가 안된 배였다. 과거의 경험들을 자기소개서에 쓰기에는 너무나 오래된,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은 기억들이 되었다. 여기저기 물이 새고 있었고, 대포라고는 임진왜란때나 썼던 천자총통 정도가 녹이 쓸어 방치되어 있었다. F22가 날아다니고 스텔스 전투함이 바다에 떠있는 시대에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망망대해에 출항해야 했다. 대학생활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간신히 글로 수습해보았다. 급하게 쓸 수 있는 무기들을 모아서 사회에 출항했다. 서류 광탈, 면접 탈락을 거쳐 간신히 첫 직장을 얻었다. 드디어 안정된 기반을 만들었다 생각했다. 그러나 소중한 내 첫 직장은 지방분권시대에 맞춰서 머나먼 전라도로 이전해버렸다. 서울과 나주를 오가는 생활에 지쳐 그나마 내 적성과 맞았던 첫 직장과 이별하고 전혀 쌩뚱맞은 영역이지만 안정성을 주는 두 번째 직장으로 이직했다.


그 때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기 원했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는 공무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누구는 기자가 되어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특종을 올린 기자가 되었다. 피디가 되겠다고 일찍이 꿈꾸던 선배는 다큐멘터리 PD로 자기의 길을 충실히 걷고 있었고, 많은 선배들이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나는 그저 평범한 사무원이 되었다. 내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축제처럼 즐겁게 살아온 시간들이 후회도 되기 시작했다.

 

그 때 결심했다. 내 스스로 자랑할 수 있고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원하는 일을 찾아 내 이름을 남기는 삶을 살겠다. 나도 자랑할 수 있는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쌓겠다. 남들이 부러워 할 수 있는 나만의 무기를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내가 되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사투를 벌여왔다.


우선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다. 계약직의 신분에서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나름 자존심도 버리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정규직이 되었다. 덕분에 좋은 가정을 꾸리고,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나무 배를 타고 폭풍우 속을 헤쳐나가며 정박할 섬 하나를 찾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워왔다.


그렇게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기본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춘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일터에서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들을 기반으로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쌓으면 되겠다 싶었다. 꿈은 아주 창대했다. 그러나 지금의 직장이 내가 원하는 포트폴리오를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내가 이러려고 이렇게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나의 일은 너무 만족도가 떨어졌다. 강제로 부서 이동이 되고, 팀장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나에게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고 이야기했다. 내 스스로 영혼이 없는 채로 몇 개월을 살아가니 사는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하루하루가 재미가 없었다. 이게 사는 낙이 없다고 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두 권의 책을 만났다. 모두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책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정 반대였다.


‘우리는 왜 일하는가?’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마라’


제목만 보자면 전자의 작자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설명하고 있고, 후자의 느낌은 일에 궂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권만 읽고 정리하기도 벅찬 나는 이번만큼은 두 권을 모두 다 읽고 머릿 속에서 두 저자가 한바탕 싸워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아주 지금의 내 현실을 결판내주기를 바랬다.



‘우리는 왜 일하는가’

배리 슈워츠는 본래 일은 개인의 자율성과 의미를 보장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분업, 규칙이 정해지고 감시가 강화되면서 일에서의 개인의 자율성과 의미가 박탈되었다는 것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회사는 ‘인센티브’라는 당근으로 사람들을 일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물질적 보상에 기대는 것으로 사람들은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능률도 나오지 못한다. 배리 슈워츠의 논지는 그렇기 때문에 일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의미를 찾게 해주기 위한 조직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마무리 된다. 아주 간단한 논지의 책이다. 책이라기 보다는 거의 아티클 수준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일과 관련한 우리의 태도와 열망에 대해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영향하에서 ‘인센티브 최고주의’의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만족감들이 무시 되거나 제거되는 방식으로 일은 진화해왔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짓는 것은 어느정도는 그 사람의 성격에 달려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일에서 재량권, 몰입, 의미를 없애버리면 사람들은 그 일에 ‘소명의식’을 덜 느끼며 만족감도 덜 얻는다."


"효율성과 통제의 측면을 생각한다면 책임자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즉흥적인 행동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질적으로 크게 저하될 것이다."


"급여가 반복적이고 의미없는 일을 보상해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오히려 그러한 근로자들은 고되고 지루할 뿐인 자신의 일을 체념하고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가 일에서 도전, 몰입, 의미,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설계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면, 우리는 거의 3세기 동안 인간의 동기와 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밀어넣은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길을 다시 닦기 시작하고, 도전, 몰입, 의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일터를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여기에 대해 저자인 이즈야마 간지도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이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하면서 삶의 기쁨을 박탈당하였고, 허탈감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간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노동에 몰입하게 강요된다는 것이다.  


청교도적 기독교 이념에서는 노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의무로 정의된다. 루터에 이어 칼뱅은 개인의 구원과 직업을 결합시켰다. 노동이 선행으로 강조되면서 우리는 일을 삶의 보람으로 삼는 ‘노동교’에 홀려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이즈야마 간지의 생각이다.


이것은 모든 행위 가운데 의의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시간을 자본주의의 핵심인 ‘효율성’에 맞추다 보면 모든 일에 이것이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어떠한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점점 의의를 찾는 일에 지치게 되고 행복한 삶과 멀어지게 된다. 저자는 또한 ‘천직’을 강조한 청교도적 가치가 개인주의와 만나게 되면서 개인이 일에서 자기 실현이라는 명목으로 자신과 맞는 일을 찾는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본래는 인간적인 보람을 얻어야 할 일이 어느 사이엔가 노동이라는 행위에 흡수합병되어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고 노동이야말로 가치를 창출한다는 노동가치설이 사회경제의 근본적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 더욱이 예로부터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던 차분한 관조생활의 의미가 완전히 잊혀 사라지고 단지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었다. 또한 전력으로 천직을 수행하는 일이 세속 내 금욕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이라는 프로테스탄트 가치관의 출발점이 되고 노동해서 돈을 버는 일이야말로 선행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서 자본주의라는 사고가 생겨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가 힘을 갖게 된다. 즉, 라파르그의 자본교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노동교’라는 종교에 근현대인이 완전히 홀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노동교에 홀려버린 사람들을 이 책에서는 다양한 철학자들을 통해 정의내린다.


"종말의 인간(니체) = 노동하는 동물(한나 아렌트) = 수동적인 현대인(이즈야마 간지) = 돈을 위해서 노동하는 자(폴 라파르그)"


이즈야마 간지가 주장하는 삶의 핵심은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끼는 삶이다. 궂이 일에서만 의의를 찾고, 보람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는 머리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몸=마음’이 느끼는 대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자신은 밖에도, 일에도 있지 않다. 독립적인 자아로서 세상의 다양한 사물에 숨겨진 본질을 깊이 맛보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삶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을 니체는 가장 성숙한 인간에 대한 표현으로 ‘아이’라는 상징을 표현했다. 아이처럼 창조적으로 노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아이’는 단어 그대로의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세상에게, 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을 놀이와 같이 느끼고 즐기며 살아가는 진정한 어른을 말한다.


우리는 현대 사회속에서 경제가치를 중요시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가치가 있는지, 경제성이 있는지, 했을 때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 자동적으로 고민한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모든 것을 ‘놀이’로서 즐기라고 이야기 한다. 머리에서의 계획성과 합리성을 피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숙달’될 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저 놀이처럼 즐기라고 이야기 한다.


"마음가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가볍게 해보자. 내키지 않으면 안하면 된다.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말고 그저 길고 긴 인생에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노는 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아렌트의 주장을 이야기 한다.


"아렌트도 강조했듯이 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활력과 생명을 빼앗긴다는 의미다. 이는 생명체로서 갖는 하나의 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활 또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 양의 차원으로 변질된 ‘노동’을 질 높은 ‘일’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일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기왕 일을 해야 한다면 노동이 아닌 ‘일’을 하자는 것이다. 치열하게 싸울 줄 알았던 두 저자의 주장은 일이라는 관점에서 만나게 된다. 노동의 질을 높여 ‘일’의 차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기왕 일을 하려면 ‘몸=마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운 것을 찾아서 하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주장하고 있었다.


두 저자가 머리 속에서 결판을 내주기 바랬는데 두 손을 잡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일이 아닌 ‘노동’을 하고 있었고, 삶에서 의미가 아닌 의의를 강요하며 살아왔다. 무언가 의미를 만드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치열하게 살고 싶었고 새로운 진로를 꿈꾸며 직장을 옮겼다. 옮긴 직장은 대학원 학비를 절반이나 지원해주는 곳이었고, 자존감마저 다 내려놓은 댓가로 안정적인 정규직 자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일터에서 나는 점점 피폐해져 가고 있고, 공부하지 않으면, 의미를 만들지 못하면,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억지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억지로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즐기지 못하고 아둥바둥 거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행을 갔던 기억이 났다. 여행지에서 뭔가 의미를 찾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면 보일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에서 의의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저 놀이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일도, 공부도, 너무 집착하거나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가볍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내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리고 기왕 일을 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율성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나는 내 스스로 취업 이전의 나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 시간을 너무 헛되게 쓴 것은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를 받았다. 그 때가 정말 인생을 진정으로 놀이로 생각하던 ‘아이’와 같았던 때였다.


지금의 나도 그 때의 나를 다시 찾는 것이 과제가 아닐까.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 어느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단독자’로서 인생을 ‘놀이’처럼 즐겁게 놀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난 고민으로 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그럴 듯한 원인을 설명들은 것 같다.


조금은 더 즐겁게, 느리게, 심지어 게으르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일은 할 수 있다면 자율성과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장 할 수 없다면 어쨌든 일을 하기는 해야 하니까 궂이 목숨걸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공부도 내가 즐기고 싶은 만큼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저 놀이처럼 사는 삶,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달려들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 두 권의 책을 통해서 내 주변의 것들이 무겁지 않게, 그저 가볍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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