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 (2001)
종종 영화를 권해주는 이에게 이 영화를 보았는지 묻자 그는 이랬다. "너무 어릴 때 봐서 고양이 분량에 아쉬워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자그마치 이십이 년 전에 나온 영화였다. 집에 앉아 재생 버튼을 누르고 있자니 십 년쯤 전 영화 수업의 교수님도 떠올랐다. 그런 건 영화가 아니라 동영상 보는 짓이라고 분노하셨더랬지.
그렇게 작은 화면으로 본 110분짜리 동영상은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라는 길지 못한 목록에 순조롭게 안착했다. 뒤늦게 접한 작품을 들고 하는 말이 으레 그렇듯 이십 대에 보았다면 좋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촘촘한 온기가 담겨있는 작품을 만날 때면 부쩍 그렇다.
무엇이 따뜻했냐면 이 여자애들에 대한 시선이 그랬다. 여성이나 여자라고 부른다면 좋으련만 나는 아직도 어떤 여자들을 그저 여자애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 안에서 나와 닮은 좌충우돌 여자애를 발견해서 그렇지 싶은데, 여기 그런 여자애가 다섯이나 나온다.
마음결의 갈무리가 서툴러 삐죽빼죽 드러나는 상처가 친구를 찌르고, 후회가 자신을 찌를 때를 아는지. 벌써 어른이라는 것처럼 진짜 어른들 사이에 던져진 날의 심정을, 그래서 모든 게 모호한 가능성에 머물렀던 청소년기의 친구들을 붙드는 마음을, 그렇게 어린 기억들이 아니면 이제 나를 설명할 말이 희박한 시기도 아는지.
이렇게 휘청대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증폭하는 존재는 단연 지영이다. 혼자 그림을 그리는 지영의 다락방이 등장하는 순간 이 영화가 한국 독립영화의 어떤 터닝포인트나 새로운 갈래의 시발점이었을까 싶은 직감이 들 정도였는데, 그 중력에 빨려 들어 삶으로부터 빗겨선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면 이미 그를 아는 것만 같았다.
실은 그래서 처음부터 혜주를 미워하고 싶었다. 지영이 사각사각 채운 패턴으로 감싼 선물을 건네받고도 혜주는 영 모진 소리나 뱉는다. 언제나 꾸역꾸역 약속에 응하는 지영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런 혜주가 얄밉다가도, 그를 미워하기는 실패한다. 넉넉한 집안의 공주병 막내에게도 좌절은 있어서다.
계속 딴 길로 새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길을 보여주는 태희는 그런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가족들이 뭐라 구박하든 태희는 문을 걸어 잠근 자기만의 방 안에서 꼿꼿하게 열려있다. 그는 보이는 것 너머에 호기심을 가지고 가보지 못한 세계를 궁금해한다. 위로하는 대신 지켜본다. 지영조차 태희에게는 곁을 내줄 수밖에 없도록.
다른 세 인물에 비해서는 덜 드러나있지만 화교로 보이는 비류와 온조도 사랑스럽다. 툭하면 서로로 오인 당하는 쌍둥이 자매는 백제를 세운 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직접 만든 장신구를 어디서든 펼쳐놓고 너끈히 흥정을 받아낸다. 두 사람은 넉살 좋은 태도로 이 삐걱대는 우정에 은근하고 든든한 기둥이 되어준다.
모든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지만 유독 마음이 쓰이는 장면들이 있다. (이하 스포일러) 지영의 집에 찾아간 태희가 할머니에게서 만두를 받아 삼키는 장면이나, 혜주가 부려먹던 남자애의 어깨에 문득 머리를 기대는 장면이 그렇다. 그중 제일 아픈 순간은 말문을 닫아버린 지영을 볼 때였다.
그런 늙은이들 가버리니 좋지 않냐는 수사관의 독한 농담에 지영은 밥을 엎어버린다. 정 없는 경찰의 패륜 발언에 함께 의분이 이는 대신 소리 없는 지영의 감정이 읽힌다. 어쩌면 그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노친네가 없어야 비로소 자신은 자유로워질 거라는 불운한 예감을 안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영의 세상이 지붕과 함께 한 차례 무너지고, 그 집에 남은 건 어느 밤 지붕에 숨어 속을 썩였던 아기 고양이 티티뿐이다. 길에서 태어난 티티는 다섯 사람 사이를 오간다. 영화 말미, 태희는 아빠의 지갑을 털어 지영을 데리러 가면서 티티를 온조와 비류에게 맡긴다. 둘이라면 고양이를 잘 돌봐줄 거라면서.
이렇게 티티를 만나는 다섯 사람은 내내 벽을 마주한다. 혜주는 지위 상승으로부터, 쌍둥이 자매는 조부모로부터, 태희와 지영은 경리나 선원 같은 기회로부터 계속해서 거절당하고 밀려났다. 이제 폐허가 된 집과 가족사진의 빈자리를 남긴 채 지영과 태희는 고향을 뒤로하고 멀리로 간다.
돌이켜보면 내 이십 대도 하염없이 자리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다. 모두가 인정해 줄 만한 길에서 벗어나있는 외로움은 독하고 무거웠다. 그래서 더욱, 여기저기 맡겨지는 가여운 고양이의 신세에 이들의 젊음을 빗대어 보고 싶지는 않다. 그저 미래에는 고양이 티티도 이들 다섯 사람도 자신의 자리를 찾기를 바랄 뿐.
영화와 내 나이 사이에는 십 년쯤 시간이 있었는데도, 이들에게서 읽히는 건 강산처럼 변하는 게 아닌 어린 마음 그 자체였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간직한 빛은 그런 것이니, 세월이 얼마나 더 흐르든 늘 새로운 여자애가 이들을 알아보지 않을까. 미래의 고전이 될 것 같은 작품이었다. 언제든 한결같이, 고양이를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