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는 이름으로는 너를 구할 수 없을까

마이 브로큰 마리코 (2022)

by 이다솜X김세계

사람은 언제 절망할까. 오래 전 한 글쓰기 수업에서 이 질문을 받은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때라고 대답했고, 당시의 스승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라는 답을 들려주셨다. 그해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탓에 이 답은 오래도록 그 해와 함께 내 안을 떠돌았다. (이하 스포일러)


시이카가 맞닥뜨린 순간도 그런 절망이다. 일어로는 だち, 영어로는 buddy라고 번역된 그의 '친구', 마리코는 죽었다. 자살했다. 뉴스를 듣고 당황하여 메시지를 보내보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이카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내 반박을 하나 깨닫고 약속한다. 마리코, 너를 바다에 데려가 줄게.


그날 보지 못했던 바다를 보러 가자. 그는 회사를 뛰쳐나가 마리코의 부모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어른다운 처세로 진입한 집에서 유골함을 빼앗아든다. 사회인 시이카라면 이렇게 기이한 절도는 저지르지 않을지 모른다. 마리코의 친구 시이쨩은 저지른다. 애도할 자격이 없는 이로부터 마리코를 돌려받는다.

MV5BZTdjYjJhYmEtYjE0NC00ODY1LTk2ZDctMGY3MDM0YTU0ZjFiXkEyXkFqcGdeQXVyNzExNDk5MDA@._V1_.jpg 마이 브로큰 마리코 マイ・ブロークン・マリコ (2022)

시이카가 가방에 식칼을 챙겨넣은 건 그래서다. 그저 친구인 그에게는 마리코를 데려갈 권리가 없다. 마리코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이쨩은 마리코의 가족이 아니다. 지옥 같은 집구석에서 드디어 마리코를 꺼내 품에 안았지만 산 시이쨩과 죽은 마리코는 또 갈 곳이 없어서, 시이카는 그제야 운다.


어린 뺨에 묻은 멍 자국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마리코는 운이 엄청나게 나빴다. 그뿐이지만 나쁘고 어리석은 이들과 평생을 부대낀 탓에, 마음 여린 마리코는 스스로 나쁘고 어리석기를 자청한다. 그런 마리코를 지키려고 시이카는 닫혀있는 문 밖에서, 걸어잠근 문 안에서,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마리코를 내버려두라고.


그런데 조금도 마리코를 누릴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마리코는 자꾸만 자리를 내어준다. 시이카는 서서히 절망한다. 이 실망스러운 관계에서 시이쨩은 도저히 마리코의 마음에 깃든 낭떠러지를 메울 수 없는 것만 같다. 어느 날은 시이쨩조차 너덜너덜해진 심장으로 마리코에게 소리치고 만다. 너는 망가졌냐고.

Nagano-Mei-as-Shiino-Tomoyo-and-Honda-Nao-as-Ikagawa-Mariko-with-fireworks-in-My-broken-Mariko.jpg 마이 브로큰 마리코 マイ・ブロークン・マリコ (2022)

사람은 망가질 수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었던 마리코는 부서진 것 같다. 슬픔으로 지어진 복수를 자행하겠다면서 자신도 부숴버리려던 시이쨩은 그 순간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목소리를 듣는다. 다시 마리코를 발견한다. 그는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는 대신, 어느 개자식의 대가리에, 단단하고 무거워진 마리코를 던진다.


그렇게 마리코를 구한다. 죽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말에는 그런 진실이 담겨 있다. 더는 망가지지 않을 마리코는 반짝이며 날아올랐다가, 다시 중력을 따라 가라앉는다. 시이카가 살아가는 땅 위로 돌아온다. 허공을 흩날리는 유해가 없더라도 마리코는 시이카에게 영원히 안겨 있다.


친구의 유골함을 본 적이 있는지. 유골함을 들고 도망쳐서 바다에든 바람에든 친구를 실어주고 싶었던 적이 있는지. 그와 여행을 가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 적 있는지. 원작에 짓눌린듯 조금 아쉬운 영화였지만, 사랑은 불가항력이고, 예고편에서 시이쨩이 유골함을 안고 도망치는 장면을 본 순간 이미 이 영화를 사랑했다.


마리코는 영화 내내 편지의 목소리로 시이쨩에게 말을 건다. 어린 목소리는 꿋꿋하게 반짝이는 생기를 담고 있었고, 이제 여정에서 돌아온 시이쨩은 새로운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관객에게 편지가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 편지와 웃음 젖은 답변으로 나눈 이 대화는 이들만의 것이자, 남은 이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