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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Nov 30. 2020

망해가는 나라의 지식인이 기록한 역사

황현 《매천야록》(서해문집, 2006)

  

이 책을 읽도록 부추긴 수많은 책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차무진의 소설 《해인》(엘릭시르, 2017)과 《모크샤, 혹은 아이를 배신한 어미 이야기》(들녘, 2018)에 모티브가 된 만인(萬印)의 이야기가 제1권에 등장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원문이 궁금했죠. 그런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원문을 읽었습니다.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한 일급의 지식인은 왜 이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을까.   

  

일찍이 만인(萬印)이라는 한 산인(山人)이 금상의 잠저를 찾아 뵙고 두 번 절하며 축하했다.

훗날 중흥지주(中興之主)가 되실 분입니다.”

갑자년(1864, 고종 1초에 운현(흥선대원군)이 만인을 찾아 소원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산인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 있겠습니까한 가지 은혜를 받자면해인사에 있는 대장경(大藏經)》 천 부만 주시면 소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경 간행 사업을 크게 벌였는데만인도 스스로 참여했다일이 끝나자 그것을 바다에 띄웠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해인사 경판각(經板閣)은 예부터 새들이 똥을 싸지 않아서 영험한 곳으로 알려졌는데만인이 떠난 뒤로는 그렇지 못했다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경판 속에 부적이 있었는데만인이 훔쳐 가서 그리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젊었을 때 술사(術士)에게 앞날에 환난이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만인(萬人)을 죽이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그래서 사람 만 명을 죽이겠다고 기약했다.”

만인(萬人)이란 것이 만인(萬印)인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운현이 결국 만인(萬印)으로 말미암아 화를 일으킨 일은 없었으니역시 항간에서 와전된 말일 것이다다만 그때 이러한 말이 떠들썩하게 전해졌다.     


벼슬길을 포기하고 칩거하며 독서로 소일하면서도 시대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 지식인. 그의 시대는 하필이면 500년 역사의 조선 왕조가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의 끝은 널리 알려진 대로 1910년 한일합방에 이은 매천의 자결로 멈춥니다.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일부터 나머지 부분은 매천 자신이 아니라 매천의 문인이었던 고용주(高墉柱)가 덧붙여 쓴 겁니다.     


매천은 고종과 민씨 일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매천의 기록만 놓고 보면 고종은 망해가는 나라의 한없이 무능한 군주였고, 민씨 일가는 탐욕으로 가득한 국정 농단 세력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신랄한 기록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이런 판단이 비단 매천 한 사람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런가 하면 혁명의 주역으로 재평가된 동학 농민운동 세력을 시종일관 적도(敵徒), 적당(敵黨)으로 매도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읽지 않으면 모르고, 읽은 뒤에야 알리라. 제가 매번 독서에서 얻는 교훈입니다. 이제 매천이 죽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를 찬찬히 읽어봅니다.     


亂離滾到白頭年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幾合捐生却未然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태 그러지 못했구나.

今日眞成無可奈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輝輝風燭照蒼天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妖氛晻翳帝星移 요사스런 기운이 가려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

九闕沉沉晝漏遲 구중궁궐 침침해져 햇살도 더디 드네.

詔勅從今無復有 조칙도 이제는 다시 있을 수 없어

琳琅一紙淚千絲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모두 적시네.     


鳥獸哀鳴海岳嚬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沉淪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네.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 보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曾無支厦半椽功 내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데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으니

只是成仁不是忠 겨우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진 못했구나.

止竟僅能追尹穀 겨우 윤곡을 따른 데서 그칠 뿐

當時愧不躡陳東 진동을 못 넘어선 게 부끄럽기만 하구나.          



※ 1권에 흥선대원군이 부암동 석파정을 빼앗아 가진 사연, 조선 말기의 과거 시험 대리 응시자인 거벽과 사수의 이야기, 충무공 8대손이 시원찮은 사람이라는 글도 보입니다. 5권에는 자결한 민영환의 피 묻은 옷에서 죽순이 돋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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